2023년 10월 18일 수요일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 CBS 탄생

1954년에는 한국일보창간과 더불어 기독교방송이 개국하였다. 19541215일에 첫 전파를 발사한 기독교방송(CBS)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이었다.
 
원래 기독교방송은 1949년에 정식으로 방송국 설립 승인을 받았으나 한국전쟁으로 설립이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다시 설립 허가를 받아 개국하게 된 것이다.
 

# 기독교방송이 KBS에 비해 유리했던 점

 
기독교방송의 국장은 미국인 선교사 감의도(Otto. E. Decamp)였다. 기독교방송의 탄생은 감의도가 미국 선교 본부로부터 5kw 송신기와 부속 일체를 발주받고 방송국의 운영에 소요되었던 모든 자금은 미국 뉴욕에 있는 기독교 단체 ‘RAVEMCO’의 원조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 만큼 기독교방송은 KBS에 비해 여러 가지로 유리한 면이 있었다. 이와 관련, 정순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깨끗한 음질, 다양한 음원 소유

 
기독교방송이 청취자의 환영을 받은 것은 우선 그 깨끗한 음질이었다. 국영 KBS가 쥐꼬리만한 예산으로는 구할 수 없었던 LP(33.3회전)을 미국에서 기증받아와서 틀어제끼니 당할 수가 없었다. KBS도 비상이 걸렸다. 오 실장(오재경 공보실장)의 지시로 LP1만 매를 긴급 구입했으나, 정부의 까다로운 구입 절차를 밟아가며 판을 사다 보니, 잘은 모르지만, 값이 헐했던지 RCA판만 몰려 들어와 매일같이 토스카니니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RCA 전속이었다)의 연주와 야사 하이페츠의 바이올린 연주만 만끽했었으니, 판을 고르게 갖추어 놓고 있었던 CBS를 이길 수가 없었다. 지금은 흔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전화 신청도 CBS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딴 다이얼 Y를 돌려라는 청취자의 인기를 독점했다. 따라서 당시의 오 실장의 구호는 CBS를 능가하는 KBS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렇듯 KBS 라디오와 CBS의 선의의 경쟁이 라디오를 점점 재미있게 만들어 오락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휴전 후의 국민의 관심을 자연히 방송에 집중시켜 놓게 된 것이다.”
 

# 공산권 선교를 위해 시작된 극동방송

 
정부는 기독교방송과는 별도로 1954727일 또 하나의 종교방송을 허가했는데 그건 동북아시아 전역, 특히 공산권을 대상으로 한 국제 선교방송인 극동방송이었다. 극동방송은 19561223일에 개국하여 한국어ㆍ영어 중국어ㆍ러시아어로 선교방송을 개시했다.
 

# 휴대용 녹음기 무게가 20kg

 
당시 라디오 방송 보도프로그램의 취재에는 휴대용 녹음기가 사용되었는데 그 무게가 자그마치 20kg이 넘었다. 기자가 PD들은 그 무거운 녹음기를 어깨에 메고 전국의 뉴스 현장을 휩쓸고 다녔다. 김훈에 따르면,
 
그 무렵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목젓을 울렸던 군것질은 아이스케이크였다. 남루한 차림의 소년 행상들이 아이스케이크 궤짝을 메고 여름날에 비지땀을 흘리며 거리에서 아이스케이크를 외쳤다. 이 휴대욕 녹음기가 행상 소년들이 아이스케이크 궤짝과 꼭 닮아서 기자와 PD들은 이 녹음기를 아이스케이크통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이 아이스케이크통은 방송에 활력과 기동성을 불어넣었고, 음향 자료 추적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손으로 돌리는 태엽이 풀어지면 녹음 도중 회전속도가 떨어지고 녹음 내용이 늘어져버려 PD들은 곤욕을 치렀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 2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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