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최대 업적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창작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세종대왕이 신숙주, 성삼문 같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는 공동 창작설이 일반적이다. 신숙주 등이 요동에 유배 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열 세 차례나 만나 자문했다는 일화까지 곁들여지면서 이는 일종의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 공동 창작설의 진원지는 조선 초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다.
그런데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최초로 공개된 세종 25년(1443), 성현의 나이는 네 살에 불과했다. 《용재총화》는 성현이 세상을 뜬 연산군 10년에 저술한 책인데, 이때는 훈민정음이 창제된지 61년 후였다. 따라서 《용재총화》보다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기록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처음 전한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자의 기록에는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달에 임금이 직접 언문(諺文) 28자를 만들었다.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본떴는데,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文子 : 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나라의 이어(俚語 : 이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다. 글자는 비록 간요(簡要)하지만 전환(轉換)이 무궁한데 이를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세종실록》은 “임금이 직접 언문 28자를 만들었다”(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전한다. 실록은 신하들이 임금의 명을 받아 어떤 일을 할 경우 반드시 그 사실을 기록했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만들었다”라는 말은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는 뜻이다. 굳이 공동 창작자를 꼽는다면 세종 25년부터 대리청정했던 문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공동 창작설은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을 가지고 운서(韻書)를 편찬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漢字) 자전(字典)은 두 종류가 있다. 옥편(玉篇)이 뜻을 중심으로 분류한 자전이라면, 운서(韻書)는 음을 중심으로 분류한 자전이다. 신숙주 등이 훈민정음 창제를 돕기 위해 요동에 가서 명나라 사람 황찬을 만났다면 그 시기는 세종 25년 이전이어야 하는데, 신숙주 등이 요동에 간 것은 훈민정음이 완성되고 나서 2년 후인 세종 27년(1445)이다. 《세종실록》 27년(1445) 1월 7일자는 이렇게 말한다.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 성균관 주부 성삼문, 행사용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 운서(韻書)에 관해 질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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