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9일 월요일

[한국전쟁]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쥐잡기 작전’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그 시기에 미군은 북한을 폭격하기에 바빴고, 남한 산악 지대를 파고든 북한군 잔류 세력은 빨치산 투쟁을 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빨치산 세력이 가장 왕성한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뒤바뀌곤 하였다.
 

# 빨치산 토벌작전, ‘쥐잡기 작전

 
빨치산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휴전회담의 한국측 대표였던 백선엽은 19511116일 토벌군사령관으로 차출되었다. 최전선의 2개 사단도 토벌군으로 차출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8군사령관 밴플리트에게 간곡히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백선엽이 지휘하는 토벌군 부대의 이름은 () 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였으며,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이었다. 예하 부대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비롯한 군경합동으로 모두 3개 사단 4만여 병력이었다. ‘쥐잡기 작전122일 아침 6시부터 개시되었다.
 

#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당시 지리산에는 이현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의 주력 3800여 명이 출몰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는 1950825일 경남 거창의 미군 사령부를 습격해 1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냈고, 그 해 12월에는 충북 단양경찰서와 문경경찰서를 기습하기도 했다

517월 이현상 주재로 지리산에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등 남한 6도 도당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이현상을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남부군은 여러 빨치산 조직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 귀순 빨치산으로 구성된 보아라 부대

 
쥐잡기 작전521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육본 자료에 따르면 토벌 결과는 사살 5800, 포로 5700명이었다. 미군측은 523월에도 아직 3천 정도의 빨치산이 그 지역에 남아있는 걸로 추정하였다.
 
쥐잡기 작전이후에도 빨치산 토벌은 계속되었다. 귀순 빨치산으로 구성된 빨치산 토벌부대인 보아라 부대의 경우도 534월까지 토벌에 계속 참여하였다. 2대 전투경찰사령관으로 부임한 경무관 신상묵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든 부대라 만천하에 의심많은 사람들아, 두고 보아라, 이 부대의 눈부신 활약을 똑똑히 보아라!”라는 뜻에서 보아라 부대로 명명한 것이다. ‘보아라 부대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인가 자살인가?

 
1953918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한 수색대도 모두 빨치산 귀순자로 편성된 부대였다. 이현상을 사살한 김은석은 이현상의 호위병이었다. 그는 이현상을 사살한 후 시체에 대고 거수경례를 하면서 선생님, 죄송합니다하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현상의 호위병이었던 김영태는 토벌대가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경찰과 군에서는 서로 자신들이 사살했다고 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남로당이 밀사를 보내 쏘았다는 주장도 있다. 지리산 빗점골로 내려가던 그가 매복해 있던 군경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부상한 것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는 부상을 입고도 너끈히 산으로 올라왔고 나중에 총으로 자살했다.”
 

# 이현상은 누구인가?

 
이현상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렇게 상반되는 주장이 있는 건 그가 그만큼 전설적 인물이었다는 걸 시사해주는 것이다. 남부군의 저자인 이태에 따르면,
 
제가 생포되어 취조를 받을 때 제일 애를 먹었던 게 이현상의 축지법 쓰는 방법을 말하라고 하는 요구였습니다. 또 벽을 옆으로 이렇게 왔다 갔다 걸어다녔다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소백산맥 주변에는 그런 얘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담장을 훌훌 뛰어넘는다는지 하는, 중국 영화 같은 그런 얘기가 많은데, 실은 전혀 그런 신통력을 가진 분은 아니었고, 남부군에 쓴대로 중후한 인상, 아주 과묵하고도 대단히 인정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굉장히 따랐습니다. 거기 나온 대로 그저 선생님 말씀이라면 신의 계시처럼 알았습니다.”
 
이현상은 금산 출신으로 유진산과 임영신이 그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 이현상은 빨치산 투쟁을 하긴 했지만 남북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파적인 성격이 농후했다. 이태에 따르면,
 
남부군은 죽을 때 인민공화국 만세!’ 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불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현상을 방랑자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방랑자는 어디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북이고 남이고 적응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 텐데, 저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 마지막 여자 빨치산, 정순덕

 
빨치산 활동을 하다 잡힌 사람들은 포로 교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은 폭도로 분류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빨치산 토벌은 53년도까지 계속 강조되었으나 54년부터 중요 과제의 위치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5649일에는 거창에서 지리산 공비토벌이 완료되었음을 축하하는 지리산 평화제가 거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6713일 전북 정읍에서 빨치산 1명이 사살되고 2명이 생포되었다. 이로써 빨치산은 정부의 공식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만, 빨치산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마지막 여자 빨치산이자 지리산의 전설로 알려진 정순덕이 지리산 내원골 민가에서 체포된 것이 입산 12년만인 6311월이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248-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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