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9일 월요일

[한국전쟁] 승부사 이승만,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기반을 마련하다(자유당 창당)

한국전쟁의 와중에 승부사 이승만은 정당 조직을 선언한다.
 

# 지금은 정당을 조직할 때이다

 
이승만은 1951815 경축사를 통해 일반 국민이 정당의 의미를 철저히 알기 전에는 정당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시기가 와서 전국에 큰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이유는 가난한 노동자, 농민의 대변 기관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창당 과정이 이승만의 뜻대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이승만이 정당을 원한 건 이제는 사색당쟁의 역사와 습관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원한 건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로의 개헌이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개헌이 실시될 경우 자신들의 영향력 퇴조를 예상한 보수파 의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이 각각 별개로 창당되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원외 자유당은 개헌 찬성, 원내 자유당은 개헌 반대였다.
 

# 자유당 창당에 발벗고 나선 이범석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이 1951831일에 귀국하였다. 이범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밑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로 이승만에 대한 그야말로 맹목적인 충성파였다. 그는 결국 이승만에 의해 또 한번 토사구팽을 당하게 되지만, 바로 그 점을 알아야 이승만이 이후 이범석을 앞세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자유당 창당의 대업을 이범석에게 맡겼다. 이범석은 창당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일주일간 하루 평균 3차례 강연을 하는 강행군을 했다. 시간이 없었다. 대통령의 임기가 반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면 서둘러야 했다. 이승만의 입장에선 국회의 다수가 자신에게 적대적이므로 민의(民意)를 포섭하고 동원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범석의 탄탄한 민족청년단(족청) 조직 기반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가장 조직이 큰 5개 사회단체(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총연맹, 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산하 기간 단체로 편입시킨 것도 이들의 전국적인 조직망과 수백만 회원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 자유당, 창당되다

 
드디어 12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1223일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자유당이 탄생했다. 원래 소장파 의원들은 14일에 등록을 하러 갔다. 공보처는 결성대회를 치른 후 오라고 했다. 그래서 결성대회를 치른 23일 공보처에 등록하러 갔더니 이미 17일에 자유당이 등록돼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하라는 게 아닌가. 그러나 끝까지 자유당을 고집해 등록했고, 그래서 의원 중심의 원내 자유당과 족청 중심의 원외 자유당이 생겨난 것이다.
 
이승만은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 자유당은 무시한 채 개헌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범석의 원외 자유당 결당식에만 선언문을 보내 치하하였다. 이승만은 그 선언문에서 오늘 자유당 결성식은 나의 반백년 꿈의 성취를 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당

 
애초에는 당명을 자유당이라 하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한 당이라는 의미에서 노동당이라 부르려 했다. 그러나 노동당이란 명칭은 공산당 냄새가 풍긴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52124일 발표한 정당에 관한 담화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 명칭을 노동당으로 하려 했으나 자유당으로 한 것은 우리가 자유를 다 보존하여 노동 대중으로 하여금 정부를 보장토록 하는 데 그 근본 이유가 있다. 창당 목적은 노동자, 농민 대중을 대표한 정당을 만들어서 민주국가의 영구한 토대로서 정객이 이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있으며, 특수계급에 해당하는 한국민주당의 모든 세력자와 부유한 사람들의 의도를 받아 대다수 민중의 복리를 돌아보지 않고 특수조직을 만들어서 내각 조직을 한다면 나의 평생 목적에 위반되는 것이므로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대중인민으로 하여금 일민주의라는 정강 밑에서 전국의 대다수 인민을 모아 이 정강을 실천하며, 우리 대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서 정부가 소수세력이나 재산가의 손에 들어가지 않고 대다수가 소수민들의 압박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 민국당의 보수성을 혹독하게 비판한 이승만

 
흥미로운 건 이승만이 자유당 창당 선언에서 민국당의 보수성을 혹독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민족 전체의 이익보다도 사리사욕과 정당의 권익을 위하여 정실인사와 협잡과 남용으로 국정을 모독하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문화도덕을 퇴폐시키고 국민 대중을 억압, 착취하고 있다. 이 반동세력들은 우리 헌법 정신에 반역하고 시대의 흐름에 역류하여 신흥 특권계급을 형성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준동하고…….”
 
훗날 이승만의 지지자들은 이승만의 이런 발언에 근거하여 이제 곧 나타나게 될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과 이후 내내 악화되는 이승만의 독재를, 반동적인 국회를 누르고 민의(民意)를 따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식으로 옹호하게 된다.
 

# 누워서 침뱉기... 최악의 차악 비판... 유체이탈 화법

 
그러나 국회의 지지는 받지 못하고 국민의 지지는 받던 이승만이라는 주장은 다른 건 제쳐 놓더라도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만다. 선량한 시민이라도 관()을 거역하면 언제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그 공포감을 악용한 협박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처지야말로 정작 고려돼야 할 당시의 특수한 정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국당이 보수적인 특권계급이었던 건 분명한 만큼 이승만의 민국당 비판에도 타당한 일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에서부터 거창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승만 정권이 저질러 온 무수한 과오와 실정을 생각한다면, 이승만의 그런 비판은 최악의 차악 비판에 지나지 않았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257-262]
 
=-=-=-=-=-=-=-=-=-=-=-=-=-=-=-=
 
정치인들이 말하는 때가 무르익었다’, ‘구국의 결단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때와 결단이라는 것을 국민들은 알면서 속아준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정당을 만들 때가 왔다는 것은 정당을 만들어야 자신의 권력이 연장될 것이며, 국회를 통해서는 도저히 재선하기 힘들기 때문에 직선제로 가기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 권력을 위해 다시 한번 이범석이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범석의 족청을 바탕으로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러한 자유당의 창당에 즈음하여 이승만은 겉으로는 그럴듯한 이론을 자유당 창당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운다.
 
부패하고 기득권을 나누려 하지 않는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정의의 사도 이승만과 자유당이 나섰다!
 
누워서 침뱉는 꼴이고... 이승만이 이승만을 비판하는 꼴이다... ‘유체이탈 화법이다.
최악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데... 이승만은 차악이 부끄러운 것이니 모두가 대동단결해서 최악을 선탁하자는 주장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