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9일 월요일

[한국전쟁] 휴전회담 : 모두가 휴전을 원하지만 아닌척 표정관리, 그리고 유치한 기싸움

김일성은 개전 1년만인 19516월 무렵부터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모택동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휴전에 절실한 김일성과 모택동, 느긋한(?) 스탈린

 
모택동은 195165일 소련의 스탈린에게 보내는 비밀 서한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정 문제와 군사작전의 어려움 등 심각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이에 대한 조언을 받기 위해 가오강(중국 공산당 중앙위원)과 김일성 동지를 모스크바로 보내겠다고 밝혀 사실상 정전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장기전은 중국군으로 하여금 전장에서 현대전을 습득케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트루먼 정부를 흔들어 연합군의 군사적 권위를 꺾을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런 생각은 613일 가오강과 김일성을 만난 뒤 바뀌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나도 현 시점에서 정전이 타당하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고 알렸고 이에 따라 공산측은 정전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 휴전에 절실한 트루먼

 
휴전을 원하는 건 트루먼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처음 7주간 미국인들의 전쟁 지지도는 65%였으나, 19512월경에 39%로 떨어졌다. 트루먼의 지지도는 전쟁 초기인 50843%를 기록한 이후 1951226%, 1951524%까지 떨어졌다. [트루먼은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831%로 올랐다가 전쟁이 답보 상태에 빠지자 19511123%, 52428%로 내려갔다] 이제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확전론자인 맥아더를 해임까지 한 마당에 휴전을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 미ㆍ소의 휴전을 위한 접촉

 
195161일과 5,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요청을 받은 미국의 소련 문제 전문가 조지 케난이 당시 유엔 주재 소련 대사 야콥 말리크와 비밀리에 접촉했다. 이들은 6일 뉴욕 근처의 롱아일랜드에서 만나 정정협상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 휴전 반대의 공허한 메아리, 이승만

 
이승만은 627일 휴전은 소련의 흉계라고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소련의 지도자들이 무력으로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제와서 양면 외교를 통해 달성코자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분단 상태에서의 정전은 한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을 돕는 미국의 입장에선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지리적으로 워낙 불리했기 때문에 제한전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데다 인명 피해가 너무 막심했기 때문에 휴전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19516월 말 현재 미군 피해만 하더라도 사망 22300, 실종ㆍ포로 4400, 부상 53100명이었다.
 

# 휴전 회담을 위한 장소는 개성으로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사령관이 된 리지웨이는 김일성과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630일 휴전회담을 제의하였고, 이들은 71일 이 제의를 수락하였다. 리지웨이는 630일 성명에서 회담 장소로 원산항 근처에 있던 덴마크 병원선을 제의했지만, 개성을 원한 북한과 중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개성은 북한의 점령 지역으로 15km를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유엔군측이 심리적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북한은 바로 이걸 노렸다. 게다가 회담 장소는 유엔군 작전 지역에서 제외되는 성역이 될 것이기에 북한측은 개성 지역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 북한의 노림수, ‘미국측이 휴전을 먼저 제의했다!’

 
71일 정전을 위한 예비회담은 북한의 그런 노림수를 잘 보여주었다. 유엔군 대표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문산에 내려 지프차를 타고 북측으로 향했다. 유엔측은 사절 표시로 국제관례에 따라 차에 백기를 달고 회담 장소인 개성 래봉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평양방송은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미국측이 백기를 들고 와 사죄하고 배상을 약속했다느니 적군이 항복하러 오는 길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선전하였다.
 
710일부터 본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측 수석 대표는 미 해군 극동지역 사령관인 중장 터너 조이, 한국군 대표는 제1군단장인 소장 백선엽, 공산군측 수석대표는 소비에트 조선인인 북한군 총참모장 남일이었다.
 

# 치열한 기 싸움 : 반말에 반말로 대응한 호레스 언더우드

 
통역장교로 참가한 선교사이자 미 해군 대위인 호레스 언더우드의 증언이다.
 
첫 정전협상 모임 때였는데, 북한측은 자신들이 유엔 대표를 내려다 볼 수 있게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우리에게는 방바닥에 등받이만 있는 의자를 주더군요. 지금 회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그만큼 ()’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한번은 북한군 소장이 유엔 대표에게 반말을 하는 거예요. 저도 질 수 없어서 유엔군 소장의 말을 통역하면서 막 반말로 해댔죠. 그러니까 북한군 소장이 어디서 대위 따위가 장군에게 반발을 하냐며 화를 낸 적도 있습니다.”
 
터너 조이는 곧 자신의 의자를 정상적인 크기의 것으로 바꾸었지만, “그때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이 사진을 다 찍고 난 후였다.”
 

# 깃대 높이기 경쟁 : 유치함의 극치

 
깃대 높이기 경쟁도 있었다.
 
유엔측이 테이블 위에 작은 유엔기를 놓자 이 점에 대하여 미처 준비하지 않았던 공산국측은 그날 오후 유엔기보다 10cm 정도 높은 북한기를 놓았으며 그 이튿날은 깃대 높이기 경쟁이 벌어져 기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는 우스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 낙서로 백선엽을 모독한 북측 이상조

 
북측 대표단 일원인 소장 이상조는 백선엽에 대한 모독도 서슴지 않았다.
 
이상조는 어느 날 양측이 의견 대립으로 귀측은 할 말이 없는가라는 말만 주고 받은 후 약 1시간 가량 무언으로 대좌하고 있는 도중 백지에 빨강 색연필로 낙서를 하더니 이것을 슬며시 내쪽으로 비쳐 보였다. 거기에는 제국주의자의 주구(走狗)는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고 적혀 있었다.”
 

# 기싸움에 눈싸움

 
그야말로 기() 싸움의 연속이었다. 기 싸움에 눈싸움이 빠질리 없었다. 고은의 눈싸움 7시간이다.
 
길고 긴 휴전회담 / 지겹고 / 지겨운 휴전회담의 / 첫 번째 회담이 시작되었다 / 유엔군 대표 조이 중장 / 북 대표 남일 대장 / 판문점 밖은 아직도 격전 / 조이 제안 / 휴전선은 경기도 연천ㆍ철원 / 강원도 금화ㆍ간성을 잇는 캔자스라인으로 정하자 / 남일 제안 / 전쟁 이전 38도선으로 복귀하자 / 너희는 38선 이북을 겨우 2개월 점령했다 / 우리 인민군은 38선 이남을 5개월간 점령했다 / 너희가 소위 캔자스라인을 주장한다면 / 우리는 저 아래 낙동강을 휴전선으로 주장할 것이다 / 조이 / 아니다 전쟁의 제공권 재해권은 완전히 우리가 장악했다 /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단 한명 병사도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 않고 일본을 항복시켰다 / 남일 / 너는 중대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 일본을 항복시킨 건 / 먼저 조선인민의 해방투쟁 / 8년간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 그리고 소련참전이다 / 너희는 일본과 5년 싸웠으나 / 결국은 소련참전으로 이긴 것이다 / 그뒤 / 장장 7시간 10분은 입 다물고 눈싸움으로 보냈다 / 눈감으면 지는 눈싸움
 
이런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측 이상조는 콧등에 왕파리 세 마리가 달라붙었는데도 인민군은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선지 까딱도 안하고 후일 조이 중장이 지저분한 인간이라고 평했다는 것이다.
 

# 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에 대한 절실함, 스탈린의 느긋함(?)

 
이런 기 싸움이 시사하듯이, 회담의 난항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당장 문제가 된 격돌 의제는 38선은 군사경계선으로 할 것인지와 외국군 철수 문제 등이었다. 난항이 거듭되자 모택동과 김일성은 그래도 협상이 계속되기를 원한 반면, 스탈린은 전쟁 종결을 서둘러선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던 스탈린이 그런 입장을 보인다는 건 그가 시종일관 한국전쟁을 오직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겠다는 계산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었다.
 

# 회담 도중 군사적으로 압박을 시도한 미군

 
리지웨이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710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북한과 중국 공산군에게 최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겨 줌으로써협상이 타결될 수 있도록 군사적으로 압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년 후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는 존 포스터 덜레스에 따르면 중국군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명백한 우위를 (모든 아시아 국가들 앞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의 협상에서 얻어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8개월 동안 미 공군은 적의 통신망과 보급로 타격을 이유로 철도, 차량, 도로, 교량 파괴는 물론 마차나 손수레, 창고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주택과 방공호에 네이팜탄과 소이탄, 세열탄 등을 퍼부었다.
 

# 휴전을 반대한 박헌영

 
김일성과 달리 박헌영은 휴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51814해방 6주년 평양시민 대회에서 박헌영에 대한 사실상의 비판을 담고 있는 주장을 폈다. “벽에 몰린 미 제국주의자들이 휴전을 제의하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어 다시는 침략을 하지 않겠다고 휴전을 제의했다.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한 미국

 
그러나 미국이 벽에 몰린 건 아니었다. 미국은 19518월 내부적으로 미군이 군사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경우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10월에 허드슨 하버라는 암호명 아래 몇 차례 원자탄 투하 연습까지 실시하였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 이유는 원자탄 사용이나 확전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 유엔에 조기 정전을 호소하려던 김일성, 소련의 견제

 
미군의 폭격 세례에 질린 김일성은 독자 행동에 나서 5111월 유엔에 직접 조기 정전을 호소하였다. 북한의 피해가 너무 심각해서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자 소련의 강력한 견제가 들어왔다. 소련 제1외무차관 그로미코는 1119, 20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레베데프에게 서한을 보내 현 상황에서 북한이 유엔에 정전을 호소하는 것은 정치적 불이익만 초래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북한은 조기 정전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237-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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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에 임하는 당사자들은 최대한 가오가 상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면에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회담이 절실하지만 먼저 제안하는 것은 꼬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보여질 수 있기에 판을 깨지 않는 한도에서 기싸움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면에서 기싸움이 동원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유치찬란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회담 전에 다른 의자를 내놓은 것도 그렇고, 깃대를 조금이라도 높게 보이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그렇고,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의연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버티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그러한 기싸움이 한창인 상황 속에서 나홀로 휴전반대를 외친 외로운 투사가 눈에 띈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두가 휴전을 원하고 있을 때 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심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납득이 되지만, 전쟁이 터지자마자 대전으로 도망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 하다. 비유하자면 시비가 붙어서 초반에 얻어터지기 전에 도망치던 사람이, 든든한 우군이 등장하자 가장 용감하게 뒤에서 상대방에게 욕을 해대는 모양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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