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9일 월요일

[한국전쟁] 거제도 : 한국전쟁의 축소판

유엔군은 19501127일부터 거제도에 총 360만 평이나 되는 대규모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 176천여 명의 포로를 엉망으로 관리한 미군

 
전체 포로의 수는 176천여 명으로 여기에는 민간인 억류자 54천명, 중국군 2만 명, 여자 포로 3천 명이 포함돼 있었다.
 
수용소 관리를 맡은 미군의 포로 분류는 전반적으로 보아 엉망이었다. 그래서 친공, 반공 포로가 마구 뒤섞인 채로 수용되었는데, 이게 바로 비극의 씨앗이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치열한 내부 전쟁이 벌어짐에 따라 거제도는 한국전쟁의 축소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전향공작이 가져온 유혈극

 
19517월경 미군은 포로수용소 정책을 총력전의 새로운 분야로 규정했다. 미군은 강제 수단을 동원해 포로에 대한 재교육을 강행했다. 이른바 전향공작이었다. 이는 친공계 포로의 거센 저항을 야기해 유혈극 사태를 빚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 ‘자동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

 
1951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의 가장 큰 난제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포로의 자동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북한과 미군은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측은 포로들의 의사를 먼저 묻고 원하는 대로 보내주자는 자유송환’(또는 자원송환)을 주장했고, 북한측은 포로들을 의무적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자동송환을 주장했다.
 
제네바협정 118조에는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 없이 석방ㆍ송환되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미군측은 이를 무시하고 자유송환 원칙을 고집했던 것이다.
 

# 미국이 자원송환을 고집한 까닭 : 도덕적 승리

 
한홍구는 미국이 자원송환을 고집한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나마 결정적 승리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런 정책이 과연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정책이었느냐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이 문제로 인해 정전협정 체결이 지연되는 동안 열악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포로들의 인권이 더욱 유린되었기 때문에 포로들은 오히려 자원송환 원칙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전협정이 늦어지는 동안 발생한 양쪽의 엄청난 인명 피해를 포함하면 정치적 의도가 깔린 인도주의적 주장이 때로 얼마나 무의미한 의생을 초래하는 가를 볼 수 있다.”
 
박명림도 미군측이 자유송환 원칙을 고수한 본질적인 이유는 공산 포로들이 모국 송환을 거부할 때 또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반사적 이익, 체제간 대결에서의 심리적ㆍ도덕적ㆍ선전적 승리를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에게 포로 문제는 단순히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전쟁 포로 얼마를 교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념성을 다투는 이념전쟁 자체였고 그것에서의 승리야말로 미국에게는 위신과 명분, 그리고 이데올로기 싸움에서의 승리로 보였던 것이다.”
 

# “자유송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

 
19525월 휴전회담은 딱 하나만 빼고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는데, 바로 그 마지막 하나가 포로교환 문제였다. 미국의 고집은 완강했다. 트루먼은 195257자유송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면서 우리는 인간을 살육의 대상이나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면서까지 휴전을 채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 자유의사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원칙에 따를 경우, 문제는 자유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이게 바로 비극의 씨앗이었다. 미군은 반공 포로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반공 교육은 물론 협박과 고문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휴전회담의 미국 대표 단장 터너 조이는 송환을 원한다고 표명한 포로들은 모두 실컷 얻어맞아 골병이 들거나 살해되었다. …… 대부분의 포로들은 겁에 질려 자신들의 선택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훗날 공개된 일기의 이야기일 뿐 당시 공식적으로는 다르게 말했으니 반공을 택하지 않은 포로들은 골명이 들거나 살해되는 운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반면 공산군 포로들은 수용소 안에서 비밀조직을 만들어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테러하거나 살해하였으니, 그 어느 쪽으로든 확고한 신앙이 없는 포로들은 이중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 포로들의 저항에 발포한 미군

 
1952218일 미군은 훈련된 공산주의자를 분류하기 위한 강제 분류심사에 ‘62수용소포로들이 죽창을 들고 저항하자 발포하였다. 이 발포로 포로 77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의 이런 잔학 행위를 놓고 국제적으로 비판이 일자 수용소 사령관인 피츠제럴드가 경질되고 프랜시스 도드가 부임하였다.
 

# 친공과 반공의 충돌

 
1952316일과 17일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이는 대한반공청년단이 반공궐기대회를 열며 친공 포로에게 돌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투석전이 벌어지자 미군이 친공 포로들을 향해 발포해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포로들의 인공기 게양과 미군의 발포

 
1952410일에는 ‘95수용소포로들이 김일성 만세,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인공기를 게양하자 미군이 총을 발사하여, 33명의 포로가 사망하고 57명이 부상을 입었다.
 

# 수용소 사령관 도드 납치 사건

 
19525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 도드가 친공 포로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76수용소포로들은 포로 대우 문제를 놓고 도드와의 면담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도드는 수용소 정문에서 포로들과 면담을 시작했다. 때마침 똥통을 버리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포로들에 밀려 도드는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
 
나토 사령관으로 막 전임하려는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는 후임 마크 클라크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유엔군의 권능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리지웨이는 도드가 살해당하는 걸 각오했다. “전시에는 장군의 목숨도 일개 병졸의 목숨과 같은 값을 갖는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전차 20대와 화염방사 전차 5대를 부산에 집결시켰다. 무력행사는 510일 오전 10시로 에정돼 있었다.
 

# 콜슨의 고민 : 무력진압이냐 협상이냐

 
510일 오전 8시 포로들은 신임 포로수용소 사령관 찰스 콜슨에게 도드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미군의 세균전 수행과 미군이 그간 포로에 대해 저지른 야만적인 대우를 시인할 것 등을 요구했다. 콜슨은 괴로웠다. 포로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무력행사를 할 경우 도드는 살해당할 것이고,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 역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콜슨은 도드의 생명을 구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콜슨은 미국은 세균전을 감행하였다. 미국은 포로에 대해 야만적인 고문ㆍ위협ㆍ감금ㆍ학살을 자행했다,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른다는 반공 포로의 송환 거부가 폭행과 고문 속에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각서를 써 주었다.
 

# 도드와 콜슨의 강등, 새로운 수용소 사령관 헤이든 보트너

 
포로들은 약속대로 도드를 풀어 주었으나, 512일 취임한 신임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도드와 콜슨 두 사람을 준장에서 대령으로 강등시켰다. 미군은 콜슨 각서는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포로들에 대한 무력 보복을 준비했다. 그 임무를 띠고 새로운 포로수용소 사령관으로 육군 준장 헤이든 보트너가 임명되었다.
 

# 보트너의 강력 통제

 
보트너는 다시 예전 방식대로 포로들을 강력 통제하였다. 62적기를 게양하는 모든 포로는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610일 도드를 납치했던 ‘76수용소를 상대로 본격적인 보복이 전개되었다. 공수대원 1천 명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화염방사기와 최루탄을 앞세우고 76, 77, 78수용소를 통제해가는 가운데 분쟁이 발생해 포로 41명이 사망하고 279명이 부상당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3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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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권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 속에 정치적인 술수를 갖고 있던 미국은 그런 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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