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1일 수요일

일본인으로 살기를 원했던 윤치호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친일 활동

결과를 따질 것인가, 인생 전체를 평가할 것인가
 
근대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인 윤치호는 오늘날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습니다.
 


#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

 
윤치호는 188116세의 나이에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그곳에 남아서 도진샤에서 수학합니다.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조선에 부임하는 초대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귀국합니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그는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 중서학원 미국 밴더빌트, 애모리 - 중서학원

 
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애모리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했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에는 1893년 말 중국으로 돌아가 중서학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다음해 중국인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 아관파천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진출하다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됩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자연스럽게 구미 열강과 가까운 세력으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권력의 핵심으로 진출했고 고종의 특사로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옵니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는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그는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습니다.
 

# 독립신문, 독립협회 활동

 
윤치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독립협회가 주도했던 만민공동회가 정부와 폭력투쟁을 벌이다가 강제 해산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그는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 계몽운동에 뛰어든 윤치호

 
윤치호는 1904년 중앙정계에 복귀했으나,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계몽운동에 뛰어듭니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12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 조선인들의 기대를 저버린 윤치호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그는 31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윤치호의 적극적 친일 활동

 
윤치호는 국내의 다양한 사회단체와 교육기관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 한국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습니다.
 

# 주관적인 확신에 의한 자발적 친일

 
윤치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주관적인 확신에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이 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란 강대국인 일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일본이 서구 열강에게 승리한 것을 아시아인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보고 열광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했습니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 해방 이후 친일파 사면을 호소하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윤치호는 더 이상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윤치호

 
윤치호는 모든 판단에 있어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결국은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 윤치호에 대한 연민의 심정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깝다는 연민의 심정이 듭니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더욱 깊이 새기게 됩니다.
 
[주진오, 주진오의 한국현재사,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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