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1일 수요일

[한국전쟁] “반공(反共)이 아닌, 반한(反韓)을 위한 전쟁”

1953727일 오전 109분에 정전협정이 미 해군 중장 윌리엄 해리슨과 북한 인민군 대장 남일의 서명으로 조인되었다. 소련이 정전회담을 제의한 지 25개월만에, 모두 765차례의 회담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 1953727, 정전협정

 
휴전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김일성이었다. 이는 김일성의 개전(開戰) 자체가 큰 판단 착오나 무모한 모험주의에 근거했다는 걸 말해준다.
 
이날 뉴욕타임스양쪽은 마치 휴전이 아니라 전쟁 선포에 합의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보도했다. 양쪽이 땅 따먹기 싸움을 벌이면서 정전협정 조인 직전인 7월 중순 한 주 동안에만 양쪽을 합쳐 거의 10만여 명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서명 시점에서 12시간이 지난 뒤부터 전투 행위를 중지하게끔 돼 있었기 때문이다.
 

#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

 
이 전쟁은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그 잔인성에 있어서는 20세기의 국제전이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어떤 학살도 능가하였으며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 백화점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살아 있는 인권 박물관이자 교과서였다.”
 
윌리엄 스톡은 이 전쟁에서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이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천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되었다고 말한다.
 
김동춘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250만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다. 전쟁 과정에서 월남자가 65만 정도라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면, 남한에서는 전쟁 과정에서 195만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 미군의 물량작전, 융단폭격

 
미국의 한국전쟁 전비(戰費)를 국방부는 180억 달러, 상무부는 675억 달러, 미 의회도서관은 340~790억 달러로 추산하였다. 그 엄청난 돈의 상당 부분은 폭탄 값이었다. 전후 625 전쟁사가들은 한반도 전체 파괴의 90%는 직접적으로 미군의 물량작전, 융단 폭격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너무 많은 돈을 쏟아부은 탓에 북한의 78개 도시를 지도 위에서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미국의 계획은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말았다. 전쟁 동안 북한에는 1평방킬로당 18개의 폭탄이 퍼부어졌다. 톤수로는 635천톤의 폭탄과 32557톤의 네이팜탄이었다.
 

# 북한 주민들의 트라우마... ‘반미의식

 
미군측 분석에 의하면 미 공군의 폭격으로 북한의 공업 및 주거시설의 2/3에서 3/4이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도 주변시설의 부족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북한 주민들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졌으며 미제의 잔인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게 파괴되고 전 인구의 3분의 1이 죽거나 다친 나라의 사람들이 한()에 사무친 반미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 석기시대로 돌아간 북한

 
당시 미국 태평양 지역 사령관 르데이의 선언에 따르면, 31개월 동안의 625전쟁 중, 미국 공군의 융단 폭격으로 북한 땅에는 서 있었던 것은 남김없이 쓰러졌다. 탈 수 있는 것은 남김 없이 타버렸다. 남은 것은 바위와 돌뿐이다. 초가집 한 채 남지 않았다. 북한은 이제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미국이 북한은 100년이 걸려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공언할 만도 했다. 사정이 그와 같으니, 존 할리데이가 한국전쟁은 반공(反共)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반한(反韓)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 한국전쟁은 인종말살정책

 
미 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반전ㆍ평화주의자 램지 클라크는 한국전쟁의 본질이 인종말살정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에 대한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월한 백인 병사들이 열등한 유색인종 전체를 작전ㆍ전투 대상으로 설정하고, 남과 북, 전방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살육했던거죠. 그들의 목적은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에서 가질 정치ㆍ경제적 이익을 찾는 것이었으니까요.”
 

# 미국의 군사 예산 팽창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세계 초강대 군사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전쟁 동안 미군은 150만 명에서 350만 명으로 늘어났고 연간 군사 예산은 50150억 달러에서 53년에는 500억 달러로 팽창하였다.
 
한국전쟁 이전에 군비 증강이 어려워 고민에 빠져 있던 미국에게,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나타났으며 그리하여 미국을 살려주었다.” 1954년 한 세미나에서 맥아더도 한국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말했다.
 

# 전쟁 경제의 소용돌이

 
미 군부와 군수산업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구원은 전 세계는 물론 미국에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국전쟁 때문에 대규모로 증가된 미국의 군비는 그걸로 먹고살고 번영을 누리는 사람과 집단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이후 후퇴없는 전진으로 계속 늘어나면서 전 세계를 전쟁 경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는 묘한 곳이었다. 서로 죽이는 전쟁을 치른 후에는 경제부흥이 일어나곤 했으니 그것에 맛들인 인간들이 전쟁을 포기할 리 없지 않은가.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 세계에 경제부흥의 기회를 제공했다.
 

# 한국전쟁의 수혜자, 일본

 
한국전쟁이 선사한 세계적인 경제부흥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단연 일본이었다. 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로 평가하였다.
 
미군은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했다. 주일 미국대사 로버트 머피는 일본인들은 놀라운 속도로 그들의 영토를 거대한 공급기지로 전환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없이는 한국전쟁이 치러지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심지어 얼음까지도 일본에서 갖다 썼으며, 수백만 장의 빨치산 토벌 투항 권유 전단까지 일본에서 인쇄했다.
 
일본이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특수 수입은 24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일본의 국제 수지는 적자에서 흑자로 반전하였다. 50년 경제성장률은 10.9%, 51년에는 13%를 기록했다. 51년 외화 보유고는 94천만 달러에 이르러 미국이 대일 원조를 종료할 정도였다.
 
휴전 후에도 일본은 미군의 계속적인 군수품 일본 발주(發注) 등을 통해 1960년에 이르기까지 연간 5~6억 달러 수준의 수입을 거두었다.
 

# 한국전쟁, 일본의 정체성 형성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일본에 단기 호경기만을 가져다 준 게 아니라 일본의 정체성 형성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와다 하루끼에 따르면,
 
일본은 한반도의 비극을 통해 이익을 얻어 전전(戰前)의 경제 수준으로 부활할 수 있었고, 1955년부터 고도 경제성장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이 경제붐은 일본 국민의 의식을 경제 제일주의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제 제일주의와 더불어 일본 사회의 우경화도 한국전쟁의 영향이었다. 반공 전쟁을 틈타 전범들이 대거 사회에 복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 강화는 결국 55년 자유민주당 결성으로 나타났으며, 이 보수 우익 정당은 향후 끝이 없는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군국주의적 성향마저 부활시켰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게 매우 관대한 평화조약 및 안보조약의 체결을 서두른 것도 한국전쟁의 산물이었다. 19519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 강화조약 및 태평양 안보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에게 너무도 관해해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조차도 그 관용에 있어서 사상 유례없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1952428일 공식적인 주권 독립국으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며, 19561218일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 “반공(反共)이 아닌, 반한(反韓)을 위한 전쟁

 
625 발발은 한국의 자생력을 36년간 압살했던 일본에게도 큰 책임이 있었고, 일본은 전범국가로서 그에 합당한 응징을 받아야 했지만, 이처럼 625는 일본에게 큰 축복을 안겨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은 반공(反共)이 아닌, 반한(反韓)을 위한 전쟁이었음이 틀림없다 하겠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2, 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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