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1일 수요일

서재필, 27세 이후 한국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리다

근대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 서재필은 오늘날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갑신정변에 참여, 일본으로 망명

 
188219세였던 서재필은 문과 별시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하여 일본의 도아먀 육군학교를 나온 후, 귀국하여 조련국 사관장으로 보임되었다가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던 그는 결국 정변이 실패하면서 일본으로 향하는 망명길에 오릅니다.
 

#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 서재필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서기를 감행했습니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대학을 나와 1893년 마침내 의사 면허를 받습니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바꾸고, 1894년에 미국인 여성과 결혼합니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려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습니다.
 

# 귀국 후 독립신문창간과 독립협회 활동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이 고위직에 임명하면서 귀국을 요청했으나 수락하지 않다가, 마침내 189512월에 귀국합니다. 그는 미국인 필립 제이슨의 신분으로서 김홍집-유길준 정부에 의해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했습니다. 아관파천을 겪었지만 오히려 친미적 성향을 보인 인사들의 우대를 받으며 189647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 역할을 했습니다.
 

# 반러시아적 입장, 미국으로 돌아감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시아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되어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철저하게 미국인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이름을 한글로 표현할 때는 서재필이 아니라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했습니다.
 

# 미국에서 31운동의 소식을 듣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와 책자를 발행했습니다. 1921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했습니다.
 

# 조선의 무능을 비판하고 일본을 높이 평가하다

 
서재필은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아울러 그가 1937년부터 1년간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

 
서재필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다시 반일로 돌아섭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 1947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있었고 극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194771일 서재필과 둘째 딸 뮤리엘, 김규식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 안전지대에 머문 서재필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며 열정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항상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 27세 이후 한국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

 
사실 그가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필립 제이슨으로서의 삶이 담긴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 그가 원치 않는 일일 것입니다.
 
[주진오, 주진오의 한국현재사, 25-33]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