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3일 화요일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나서라고 설득한 이승만

194658일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도 좌우파들을 대상으로 한 좌우합작을 구상하게 되었다. 좌우 갈등 지역에서는 합작을 통해 갈등을 해소한다는 게 그 무렵 미국의 대외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의 주역으로 김규식과 여운형을 염두에 두었으며, 이를 추진하기 위해 하지는 자신의 정치 고문인 레오나드 버치에게 교섭의 권한을 부여했다.
 

김규식의 좌익 기피증

 
애초 김규식김규식(金奎植, 1881~1950)은 강한 좌익 기피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합작 운동에 비관적이었다.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던 강원용에게 자신의 좌익 기피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가 공산당이 뭔지 몰라서 그래. 내가 알기로는 공산주의는 천하에 몹쓸 것이야.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돼. 내가 중국과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 봤는데, 원래 그들이 선량한 사람들이거든. 그런데 레닌이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 그들이 아주 잔인해져서 700만 명이나 숙청을 당하지 않았나? 알바니아에서 공산 혁명이 났을 때도 하룻밤에 6만 명을 죽인 일이 있었으니 공산주의란 것이 그렇게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거든. 그런데 우리 민족이 내 생각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인데 게다가 공산화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김규식 설득에 나선 이승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김규식이었기에 그를 좌우합작운동에 끌어들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치가 표면에 나선 미군정 측의 노력은 집요했다. 이승만(李承晚, 1875~1965)까지 동원했다. 미군정의 요청을 받은 이승만은 삼청장으로 김규식을 방문해 50만 원쯤의 자금까지 내놓으며 좌우합작에 나서 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미국의 정책이 이렇게라도 해야 통일 임정 수립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아우님이 한번 나와 주시오.”
 
대단한 애연가였던 김규식은 기다란 대나무 담뱃대(속칭 대통)로 즐겨 담배를 피웠는데, 이승만의 부탁을 듣자 대통담배를 탁탁 털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김규식은 이승만을 형님이라고 불렀다)은 대통령 못하면 못살 사람이고 나는 대통담배를 못 피우면 못살 사람이니 나를 대통이나 피우게 내벼러 두시오.”
 
그러나 김규식은 결국 승낙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나무에 올라선 다음에는 형님이 나무를 흔들어서 나를 떨어뜨릴 것도 압니다. 또 떨어진 다음에는 나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나의 존재와 경력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한 다음에 그 위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김규식의 뒤통수를 친 이승만

 
실제로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라고 종용한 뒤 얼마되지 않은 63일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게 된다. 이승만은 왜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도록 부탁했던 것일까?
 
이승만이 정치적 경쟁자 하나를 매장시키려는 노회(老獪)한 정치적 술수를 쓴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독립을 위해 미국 사람이 해보라는 것을 여하간 한번 해봐야 안된다는 것이 증명이 될 것 아니겠느냐는 말까지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에, 꼭 그렇게만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이승만은 사실상 김규식에게 그런 용도로 수고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며, 또 김규식은 그걸 알고서도 이승만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규식에게 그런 소모적 용도로 수고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이승만의 발상이 놀랍긴 하지만 말이다.
 

버치의 여운형 설득 공작

 
버치의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설득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버치는 여운형을 민전 및 조공과 분리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여운형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래서 버치는 여운형의 인민당에 타격을 입히는 공작을 추진해, 465월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인민당에서 탈당시키고 자금을 지원하여 사회민주당을 창립케 했다.
 
커밍스에 따르면, “여운홍과 사민당의 기교가 여운형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그를 민전 및 조공과 결별시키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버치는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약점을 잡아 그를 협박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 그 약점이란 아마도 여운형이 전쟁 중 수차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데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 기록을 조사하고 과거 한국에 있었던 일인 관리들을 심문하고자 일단의 미국 관리들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여운형은 사냥개의 이빨만큼이나 깨끗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군정이 좌우합작에 열성을 보인 이유

 
결국 여운형은 민전 및 조공과 결별하지 않은 채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왜 그렇게 좌우합작에 열성을 보였던 걸까? 후일 미군정청의 경제고문으로 있으면서 미소공위의 미국 측 대표단원이었던 로버트 키니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군정은 중도파들을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 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규식(1881년생)과 여운형(1885년생)은 서로 형님, 아우하는 사이로 오래전부터 막역한 독립운동 동지들이었기에 대화가 잘 통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약했거니와 권모술수에도 능하질 못해 좌우 양쪽으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아 비틀거리게 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1, 247-251
 
=-=-=-=-=-=-=-=-=
 
아마도 미국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려면 좌우합작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중도 우파의 김규식과 중도 좌파의 여운형은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미군정도 당시에 이승만이나 김구를 내세워서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상황이 변해서 분단된 정부가 세워진다면 미군정의 선택지는 당연히 이승만으로 좁혀질 가능성이 있었고, 그것을 가장 잘 간파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심 좌우합작이 실패할 것을 알고 또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