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3일 화요일

박은식의 『한국통사』, 동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동학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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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라는 것은 발단은 매우 미비했으나 그 결과는 매우 컸다. 한점의 불꽃이 넓은 들판을 불태우는 데까지 미치고 방울방울 떨어진 물방울이 흘러서 강물을 이루었듯이, 한국의 대란과 중일전쟁(청일전쟁)이 이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선왕 철종조 때 경상도 사람 최복술(崔福述)은 지체가 낮은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스스로 주장하기를 서교(예수교)에 대비하여 새 종교를 창도하였으니 동학이라 불렀다. 그 종지(宗旨)는 유교ㆍ불교ㆍ도교를 혼합한 것이었다. 주문을 외울 때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13자를 뇌까렸다. [동학의 핵심 주문으로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가 이뤄진다. 이 진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면 세상만사를 다 알게 된다는 뜻이다] 붓을 쥐고 신을 내리게 하고, 칼춤을 추며 공중을 솟아오르는 등의 일은 매우 황당한 거짓이었다. 그 무리들은 밤이면 반드시 깨끗한 물을 떠놓고 보국안민을 기도하고, 밥을 지을 적마다 마냥 쌀 한 숟가락씩 떼어 놓고 성미(誠米)라고 부르며 저축하여 교주의 봉양미로 삼았고, 최복술을 받들어 신사(神師)로 삼았다. 예수교ㆍ기독교 등의 서교와 같이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전국에 보급되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아니한가. 대개 그 원인은 셋이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첫째, 우리나라에 비기(祕記)가 전해 내려오는데, 정감록이라는 것은 앞일을 예언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내용에 이씨의 국운이 5백 년이면 끝이 나고 진인이 대신하여 흥할 것이며 이로움이 궁궁을을(弓弓乙乙)에 있다 하였다. 동학은 그 뜻을 취하여 말을 꾸며, “13세의 무신(武神)이 강림한다라고 하고 또 궁을’(弓乙) 노래를 불렀으며 궁을깃발을 만들었다. 또한 동학에 들어오는 자는 삼재ㆍ팔난을 면할 수 있으며, 병이 든 자는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부적을 살라 마시면 곧 쾌유된다고 하였다. 또한 총구멍에 생기는 물을 빼어 그 부적을 품으면 탄환이 들어오지 못한다고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현혹되었다. 이런 가운데 진인이 출현하여 백성[蒼生]을 널리 구제한다고도 하였으니 미신의 성행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다.
 
둘째, 우리나라의 계급에는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있으니, 양반이 상민을 대우하는 것이 노예와 같았으며, 토호들은 무단으로 약탈을 자행하며 가혹하게 억압하였다. 그런 까닭에 상민들은 양반을 질시하며 피와 뼈에 사무친 원한이 수백 년이나 이르렀으며 그 억울하고 불평하는 기운이 쌓여 이와 같이 격렬하게 반항하는 단체들을 만들어 냈으니 들판에 타오르는 불길의 기세가 끓어오르듯이 성하게 되었다.
 
셋째, 관리들의 탐학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고 잘못된 정치가 날로 더해 가면서,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신하들은 벼슬자리를 돈 나오는 구멍으로 여겼다. 지방의 아전배도 백성의 살림을 돈 나오는 원천으로 여기고 상부에 바치는 일을 과제로 삼아 백성을 후려쳐서 물품을 박탈하는 것을 직무로 삼았다. 많은 돈을 가진 집은 회벽(懷壁, 춘추좌전필부는 죄가 없지만 옥을 가지고 있으면 죄가 된다에서 나오는 성어로 보통 사람의 신분으로 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훗날 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의 죄를 씌우고, 소 한 마리가 갈 만한 땅을 가진 자도 또한 위첩지모(僞帖之謨, 위조문서를 만들어 땅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초래하였다. 마침내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살겠다는 생각에서 무리를 모아 아전배를 축출하고 관사를 불지르고 부수었으니 질서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에 동학은 여기에 편승하여 떨쳐 일어나 탐학한 관리를 죽이고 민생을 구제하며 간악한 무리를 쓸어 없애고 국가를 바로잡겠다는 뜻을 팔방에 포고하니 일시에 호응하여 일어나는 모양이 바람과 번개처럼 빨랐다.
 
최복술은 철종 말년에 요언(妖言)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죄를 받고 처형당했다. 고종 30(1893) 계사년에 그 무리 최제우(최시형을 착각하여 최제우로 표기) 등이 상소문을 올려 스승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진신(양반) 사류들이 이들을 참수할 것을 잇달아 상소하자 이들 최시형 무리는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도주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모아 호남과 호서 사이에 방책을 설치하고 깃발을 세워 원근 여러 사람들을 불러들이니, 그 세력은 점차 늘어나 퍼졌다... 고종 31(1894) 갑오년 봄에 동학교도들은 호남 지방 고부에서 난을 일으켰으니, 군수 조병갑이 그렇게 일어나게 한 것이었다... 조병갑이 집집마다 쌀을 거두어 바닷길을 이용하여 팔아먹으려다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났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ㆍ보고토록 하였다. 이용태는 그곳에 당도하여 이런 기회에 편승하여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소요를 다스리려 하였으나 도리어 더욱 소란하게 만들었으니, 민심은 더욱 격해져 난으로 발전했다. 고부 향장 손화중, 향민 전봉준, 전주민 김개남 등은 동학당 우두머리로 장대를 높이 들고 봉기하였으니, 한번 외치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그 무리가 부쩍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매우 걸출하고 지모가 있어 여러 차례 관군을 속여 패배시켰다. 오로지 미신으로써 그의 무리들을 복종시켰고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을 밟듯이 위험을 회피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나는 신부(神符 : 영험 있는 부적)가 있어 몸을 보호할 수 있으니, 비록 대포 연기가 자욱하고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부상하는 일이 없다. 너희들은 그것을 봐라하였다. 이러서 소매 속에 탄환 수십 발을 몰래 감추고 비밀리에 친한 신자 10여 명에게 지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를 포위케 하고 모두 총을 쏘게 하였는데 실제는 공포탄을 쏘게 했다. 전봉준은 포위한 가운데서 뛰어나오며 소매를 흔드니 탄환이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군중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말하길 장군은 신인(神人)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무리들은 그 부적을 차고 총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녹두장군 전봉준

이때 동학의 다른 일파가 호서 지방인 공주의 사오(沙塢), 보은ㆍ회덕ㆍ진잠ㆍ청산ㆍ옥천 등지에 모여 있었는데, 이들 중 군기(軍器)를 빼앗고 고을을 유린하는 자가 역시 수만을 넘었다. 양반 토호는 오래된 원수라서 세력에 편승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결박 지어 구금시켜 놓고 채찍질을 가하거나 그의 집을 파괴하고 그 부녀를 겁탈하거나 호롱불을 들려 혼행(婚行)의 시중드는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또는 묘지를 빼앗겼던 사람에게 돌려주거나 세력 있는 사람을 포박하여 그 고환을 자르면서 말하길 이 성질이 흉악한 사람의 종자를 베어 버린다라고하였다. 고을의 관원들도 모두 붙잡아다 군영의 문을 열고 탐학을 저지른 정도에 따라 곤장을 때렸으며, 고함지르고 꾸짖고 제멋대로 날뛰며 기세등등하게 발호하니, 그 대단한 기세가 미치는 모양이 털에 불이 붙은 것과 같았다. 열흘이 안 되어 경기ㆍ강원ㆍ황해ㆍ경상도까지 뻗쳐 나갔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이 일시에 휩쓸었으니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를 외우는 소리개 갱()에 있으면 갱 속에 가득하고 골짜기에 있으면 골짜기 속에 가득하여 미쳐 날뛰며 어지럽게 춤추니 그 모습이 해괴했다.
 
무릇 동학당은 본디 정치사상ㆍ혁명성질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대부분이 비천하고 무뢰하고 우둔하고 무식한 무리에게서 나온 까닭에 난폭하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엄격하고 각박했던 종래의 계급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졌으니 개혁의 선구라 할 만하다. 저들은 오합지중으로서 갑자기 거사하여 본디 전투의 기술도 없고 기계의 월등함도 없었으나 그 미신과 부적, 주술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강력하게 끌 만한 마력이 있었다. 또한 중앙 정계에서도 몰래 내응하는 자가 있었다. 만약 빠른 번개가 미치지 못하는 날카로움으로써 이러한 마력의 군대를 이끌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바로 서울에 들어와 개혁에 착수했다면 외인(外人)들의 간섭이 미치지 못랄 것이니 서구 혁명의 핏빛을 다시 아시아 동쪽 반도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력과 식견이 없었으니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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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는 동학에 대한 약간 부정적인 인식이 드러나고 있다. 애초에 최복술(최제우)이 술수와 민심을 이용해서 동학의 세를 불려나간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이 백성들을 속이면서 지도력을 획득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지식인들의 동학에 대한 인식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동학군들이 저지른 만행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박은식은 차라리 동학군이 서울로 빨리 입성했으면 외인들의 간섭을 따돌렸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래도 박은식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국에 원병을 요청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정부가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당국자에게 원병 요청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첫째 다른 나라에 위급함을 구해 달라 애걸하는 것은 국가의 큰 수치이며, 둘째 청일 양국이 천진조약에 따라 군대를 파병하면 우리나라가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견이 적중했음에 통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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