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4일 수요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과, 김구의 헛발질

이승만은 19466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정읍에 뒤이어 64일 전주, 65일 이리, 66일 군산에서도 거듭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지만, 대중의 이승만 지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상한 건 김구의 태도였다... 김구는 이승만의 단정론에 대해 한동안 사실상 성원을 보내는 자세를 취했다.
 

미군정도 우려했던 이승만의 돌출행동


미군정은 이승만의 행동이 너무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승만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였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과대망상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런 미군정의 부정적인 인식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더욱 가열차게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지방 순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조직 강화에 나섰다.
 
611, 독촉국민회 전국대표대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승만을 지지한 김구


놀라운 건 김구의 화답이었다. 김구는 이 대회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
 
629, 이승만은 국민운동 총본부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민총)의 설치를 발표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
 
훗날 강원용은 이때 어떻게 김구가 단정 얘기를 들고 나온 이승만과 손을 잡았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김구가 이승만을 지지했던 이유? 개인적인 의리와 신의?


김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했으며, “유학ㆍ동학ㆍ불교ㆍ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는 점이 그걸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구는 한 살 위인 이승만을 깎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는데 두 사람 사이의 그런 인간관계 또는 김구의 개인적인 의리와 신의에 대한 집착이 작용했던 건 아닐까?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나선 이승만


어찌됐건, 피를 나눈 형제 못지 않게 정()을 주고받았던 의형제 사이의 애증관계가 아니었다면, 김구의 행동은 달리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김구의 그런 지원으로 이승만은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민당계가 운영한 한국여론협회의 조사 결과인지라 전적으로 믿을 건 못되지만, 467월 서울 중심가의 통행인 6600여 명을 대상으로 던진 초대 대통령을 누가 해야 하는가라는 설문에서 이승만 29%, 김구 11%, 김규식 10%, 여운형 10%, 박헌영 1%인 것으로 나타났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40년대편 제1, 25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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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읍발언(단독정부 수립)은 정치인으로서 하나의 승부수라고 할 수 있겠다.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고, 민족의 분단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발언이지만 현실적으로 이 발언을 통해서 이승만은 마치 마라톤에서 선두로 치고 나오듯 가장 유력한 정치인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노리고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는 일반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진행해야 할지를 동물적 감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애초에 통일정부의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이후 625전쟁 통에 무력으로 북을 제압하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지만, 해방 이후에는 현실적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웠을 때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쉬운 것은 김구의 반응이다. 그는 어쩌면 해방 이후 이승만의 대항마로 충분히 부각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일찌감치 이승만과는 싸우는 것을 피하고 그를 지지하는 악수를 두고 만다. 강준만은 그것이 김구의 개인적 의리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해방 이후, 가장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귀국 직후부터 이승만의 정읍발언까지 김구는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남들 다 행동하는 걸 보고 뒤늦게 따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할때에는 카리스마있는 지도력을 보였지만, 해방 이후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는 멍때리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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