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 “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기독교 교회들로 집중되었고, 전쟁이 낳은 부산물인 수많은 난민과 고아ㆍ과부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 사업이 기독교 집단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가장 효과적인 선교 전략의 하나였음은 분명하”지만, 이는 민심의 깊은 곳에까지 파고드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미국 아니면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배경과 손을 잡은 데에만 집중적인 관심을 쏟았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고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선 개신교
1952년 8월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독교계는 ‘혼연일체’가 되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하고 권연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기독교 선거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부통령 선거를 위해서는 각 교파 단체의 이름으로 목사인 이윤영을 추대하는 선거후원회를 조직하였다.
1954년 개헌 국면에선 교회 지도자들은 선거위원회를 조직해 이를 거드는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 켐페인에 협조하지 않거나 참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이승만 지지파에 의해 ‘이단자’로 몰렸다.
김성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 대다수는 기독교인들에게 특권을 제공해주는 자유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편에 섰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이 정권을 유지해가는 동안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가장 친정부적인 조직체로서 자유당의 하수인 노릇을 서슴없이 했다. ‘기독교인 대통령 아래 전 국민의 기독교인화’라는 순진한 꿈에 젖은 한국 교회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동맹자였다. 그래서 비기독교인들은 한국 교회를 이승만 정권 혹은 자유당과 동일한 집단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을 내놓고 비판하는 기독교인은 아주 드물었다.”
# 교단 분열에 따른 문제점 : 예배당 사태
물론 기독교가 ‘밑으로부터’의 선교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앞서 지적했듯이, 기복 신앙으로 흐르는 문제점을 드러냈고, 이는 교단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데에도 일조했다. 『기독공보』 1955년 12월 26일자에 따르면,
“예배당 사태가 났다. 한 동리 안에도 예배당이 열 개씩은 될 것이다. 장로교회도 고신파ㆍ한신파ㆍ복구파ㆍ재건파 교회가 있고, 장신파에서도 서울 경기 노회 속ㆍ이북 노회 속 교회가 아무런 제약이 없이 자리잡고 세우면 그만이다. 게다가 성결교회, 감리교회까지 끼우면 한 동리에 열 개는 보통 될 수 있다...... 신학 졸업생이 해마다 많이 나오니 이들이 다 한 교회씩을 가져야 하며 서울로 교역자가 진출하니 교회당이 늘 수밖에 없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권』, 339-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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