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토요일

[한국전쟁]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 [노근리 사건]


미군의 34일 인간 사냥

 
1950726일 낮, 충북 영동군 황간면 임계리와 주곡리 마을에 미군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미군은 제1기갑사단 제7기갑연대 제2대대 H중대(중화기 중대) 군인들이었다.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이 4번 국도를 따라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하였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경부석 열차의 철로로 올라섰다. 그때 미군의 무전 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하였으며 지상의 미군들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철로 위에서만 최소 100여 명이 사망했다.
 
철로 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철로 밑의 굴다리로 숨었다. 그러나 굴다리에 은신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총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핏물을 그냥 떠마시면서 버텨야만 했다.
 
이게 바로 726일부터 3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이다.
 

피난민은 작전에 귀찮은 존재

 
왜 미군은 그런 인간 사냥을 했던 걸까? 당시 미군들은 북한군에 대한 피해의식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데다 미군이 농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 의해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겁에 질려 이성을 잃은 나머지 저지른 짓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정은용은 그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군들은 노근리 앞 철로 위에다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피난민들의 짐 검색을 실시하고, 또 폭격 후에는 철로 밑 터널 속에 그들의 위생병을 보내 부상자들을 치료까지 해주면서 피난민들이 변장한 인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했었다. 무기라고는 한 점도 갖지 않았던 피난민들, 노인과 부녀자, 유아가 절반을 훨씬 넘었던 이들로 인해서 미군들이 겁을 먹을 이유도, 이성을 잃을 까닭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생각 끝에 도달한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726일 미8군사령관이 주요 지휘관들에게 보낸 메시지에 주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말라.”
 
그날 밤 10시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조건 사격은 많이 일어났다. 1기갑사단 50829일자 일지에는 사단장이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돼 있다.
 
왜 미군 지휘부는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피난민을 작전에 방해되는 귀찮은 존재로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노근리 학살은 워낙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범죄라 이쪽에 무게가 실린다. 단지 귀찮다고 아무런 죄도 없는 민간인을 죽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노근리 사건을 넘어서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이 보인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다.
 

미군의 인종 차별주의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하찮게 보는 강한 인종 차별주의를 갖고 있었다. 단지 인종 차별주의 때문에 한국인을 함부로 죽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전쟁이건 군인들은 오직 전쟁 수행의 효율성만으로 전쟁을 치르진 않는다.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민간인들의 목숨일 것이다. 전쟁 수행에 상충되는 요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요소들의 무게나 가치를 비교적 낮게 평가하는 심리 상태에 인종 차별주의가 알게 모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건 결코 무리한 추정이 아닐 것이다.
 
해방정국의 역사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군은 한국인들을 결코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미군이 한국인을 존중하거나 좋아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손철배에 따르면, “……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서 경제적 풍요가 절정에 달했던 미국과 폐허가 된 한국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으므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노근리 사건은 44년간 잊혀진 사건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머물러야 했다. 19946월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정부 요로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지만 모두 답이 없었다. 노근리 사건은 조선인민보50819일자 6단 크기로 상세히 보도한 이래로 94429일 연합통신에 의해 첫 보도가 이루어지고 월간 말94년도 7월호에 상세히 다루어지기까지 44년간 언론매체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19999월 미국 AP통신이 보도해 세계적 이슈가 되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노근리 사건이 큰 이슈가 되었다. 199910월 초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한국 대통령 김대중이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2001112일 클린턴은 사과 성명을 냈다. 유족들은 미국보다는 한국 정부에 맺힌 게 더 많다. “군사정권 때야 아무 소리도 못하지. 술김에 벙끗하기만 해도 바로 경찰서에 데려갔어.”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군 병사는 그때로부터 49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바람 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고백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9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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