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가 터지자 제일 먼저 벌어진 ‘뿌리뽑고 씨 말리기’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국민보도연맹, 남로당 와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이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것이었다. 존 메릴은 남로당 조직의 와해는 국민보도연맹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다고 주장한다.
1950년 7~8월 수원 이남 전역에서 자행된 ‘뿌리뽑고 씨 말리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자들을 왜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한국반탁ㆍ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는 이런 주장을 내놓고 있다.
“남침 불과 5시간 만인 아침 8시는 반공 도시 개성이 이미 그들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그 순간 막 잠이 깬 개성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자들이 오히려 반공인사와 양민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 섰다. 그들의 그와 같은 만행은, 대한민국에 전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산군에게 살해될 충분한 이유가 되기에, 두렵고 불안하여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황급히 그들의 앞장에 서서 만행을 저지르게된 것이다. 사실 그 날 아침 공산군은 그들을 모아 놓고 전향한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앞장 설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개성 보도연맹원의 잔인한 행동이 정부로 하여금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들의 행동을 경계하도록 조치시킨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대구ㆍ경북 지역에서만 3만 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는데, 그들 중에서 실제로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5분의 1도 안되었다.
열 명 가운데 하나를 잡기 위해선 열을 다 죽여도 좋다!
그러나 ‘뿌리뽑고 씨 말리기’의 원칙은 열 명 가운데 하나를 잡기 위해선 열을 다 죽여도 좋다는 발상에 근거한 것이다. 6월 26일부터 전주형무소 수감자 1천 400여 명을 포함해 전주 지역에서 남한 경찰ㆍ헌병ㆍ방첩대에 의해 총 4천 500여 명이 학살되었다.
부산ㆍ경남 지역의 경우에는 인민군의 공격이 미치지 못했던 탓에 형편이 좀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보도연맹원들은 앞다투어 대대적인 ‘혈서 충성맹세’에 나섰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권』, 87-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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