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동안 황해도 신천군에 머물면서 군 인구의 약 4분이 1인 3만 5천여명을 학살하였다(신천학살). 전후에 세워진 신천박물관의 한 전시실은 “미제는 신천강점 52일간 3만 5천 383명 학살/군 인구의 4분의 1/남자 1만 9천 149명/녀자 1만 6천 234명”이라고 크게 써붙여 놓고 있다.
신천 학살 사건은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 유채화는 군인들이 벌거벗은 임산부들과 아이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피카소가 신천 학살을 소재로 이 그림을 그렸다는 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세상엔 그렇게 알려졌다.
북한은 신천 학살이 해리슨을 중대장으로 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좌우대립에 의한 학살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황석영이 2001년 6월 장편소설 『손님』을 발표하면서 ‘좌우 이념 대립의 결과’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손님』은 신천 학살의 당사자로 맑스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외래 손님’에 물든 사람들을 꼽았다. 이들이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서로 피를 보는’ 악순환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신천은 어떤 곳이었나? 신천이 고향인 한 월남인의 증언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교인들이 많은 동네”이며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제일 먼저 들어온 지역”이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권』, 149-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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