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은 이미 1949년부터 북진통일론을 외쳐댔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1949년 7월 17일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는 그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였다고 해명했지만, 9월 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
이승만은 1949년 9월 30일 외신기자회견에선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10월 7일의 외신기자회견에선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12월 30일의 기자회견에선 “우리는 새해에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대비책도 없었던 (입만 살았던) 북진통일론...
이승만과 정부의 ‘공갈 때리기’는 훗날 ‘6ㆍ25 유도설’을 낳게 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전쟁은 피하는 게 상책인데, 전쟁을 하기 위해 발버둥친 것처럼 보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공갈 때리기’가 차라리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면 6ㆍ25가 한반도를 지옥으로 변모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유도했다면 그만한 대비책이 있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공갈 때리기’는 남북(南北) 상호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증오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공갈 때리기’의 정치적 효용도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권』, 2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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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전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읽고 있으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이다. 결과적으로 6ㆍ25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형편없이 밀리는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부끄러움 때문에 위축된 행동을 하는 게 당연할텐데... 이승만과 정부는 너무나 태연했다. 속된 말로 쪽팔려서 얼굴을 들지못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승만은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맞는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구까지 도망갔다가 (너무 도망쳤다는 생각에) 다시 대전으로 올라온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대통령... 대통령인 자신이 안전하면 국가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왕조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지도자...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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