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9일 월요일

[한국전쟁] 더글러스 맥아더는 ‘영웅’인가?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자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미 제국주의의 화려함을 온몸으로 웅변해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일본, 필리핀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타고난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는 타고난 군인이었다. 그는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에 있는 병영에서 태어났다(이승만보다 5세 연하). 그의 아버지 아더 맥아더도 유명한 장군이었다. 그의 어머니 핑키는 남편의 진급을 위해 뛰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 교육에도 극성스러울 정도로 열성적인 여인이었다.
 
맥아더는 셋째 아들이었다. 큰 형은 해군 대령으로 죽었고 작은 형은 유년기에 죽었다. 더글러스는 가장 탁월한 아들이었다. 그는 미 육사에 수석 합격했고, 미 육사 역사상 최초로 A’(최우등)로 졸업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4개월 동안 13개의 훈장을 받을 정도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더글러스 맥아더

# 미 육군 역사를 새로 쓴 인물

 
그는 1919년에 귀국해 미 육군 역사상 최연소(39) 육사 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또 최연소로 정규 준장으로 진급하였다(그 전에는 임시 준장’). 그 후 그는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 주둔 부대로 전출하였다. 그는 필리핀 근무 중인 1922년에 42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으나 8년 후 신문들이 아내의 염문 스캔들에 대해 써대자 8년 후 이혼했다.
 

# 퇴역, 재혼, 공처가

 
맥아더는 그의 나이 50세인 1930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때에 아이젠하워와 패튼이 소령 계급을 달고 그의 참모로 근무하였다. 맥아더는 35년에 퇴역해 필리핀으로 가서 사실상의 군사총독노릇을 했다. 2개월 후 어머니 핑키가 사망했다. 맥아더는 어머니의 사망 직후인 37, 57세의 나이로 19세 연하인 진 마리 페어크로스와 재혼했다. 결혼 생활은 원만했다. 그는 애처가를 넘어 공처가였다.
 

# 현역으로 복귀

 
1940년부터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미 육군은 퇴역한 맥아더를 다시 현역 대장으로 복귀시켜 필리핀에 미 극동지상군을 창설했다. 맥아더는 그 사령관 자격으로 일본에 승리했고 이어 한국전쟁을 맞이한 것이었다.
 

# 맥아더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

 
맥아더는 194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부재자로 출마해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적이 있었다. 같은 공화당원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한국전 초기 동경에서 맥아더를 만나고 온 뒤 트루먼을 만나 맥아더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소환을 건의했다고 한다.
 

# 맥아더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나?

 
결국 맥아더는 1951411일 트루먼에 의해 해임당했다. 맥아더는 별 다섯 개의 종신 원수로서 전역을 신청하지 않는 한 원수 계급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해임 즉시 전역을 신청했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트루먼이 아마 정신질환 때문에 자신을 해임했을 거라고 털어 놓았다지만 나중에 리지웨이는 맥아더에게 정신질환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였다고 한다.
 

#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경력 때문이었을까? 맥아더의 보좌관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는 맥아더가 언제나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다분히 과대망상적인 기질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실패의 위협에 직면할 때마다 번번히 권총으로 자살해 버리고 말겠다는 위협을 주위에 하곤 했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여러 차례 잠자는 자신을 깨워서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한번은 제발 잠 좀 자자고 화를 냈더니 맥아더는 그 다음날 사과했다고 한다.
 

# 독선적, 이기적 기회주의자,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

 
트루먼은 70대의 5성 장군이 19살 소위같이 하고 다닌다고 못마땅해 했다. 선글라스, 옥수수 파이프, 팽팽한 모자, 잘 다린 바지 등으로 상징되는 맥아더 특유의 옷차림이 마음에 안들었던 것이다. 맥아더 전기를 쓴 마이클 샬로는 인간적으로 볼 때 맥아더는 독선적이며, 이기적 기회주의자이자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였다고 혹평했다.
 

# 한국에서의 맥아더 숭배

 
그러나 맥아더는 한국에서는 영웅이었다. 196446일 맥아더가 84세로 사망하자 조선일보한국전쟁의 영웅이며 또한 비율빈 해방의 은인이었던 맥아더 원수의 서거를 못내 슬퍼한다는 애도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한국 통일의 절호의 찬스가 맥아더의 해임으로 유실되었다면서, 그의 주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애달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만이 독점한 원폭으로서 기선을 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끝내 만성적인 비운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는 끔찍한 말도 덧붙였다.
 
한국인의 맥아더 숭배는 조선일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한 유명 재야인사는 419혁명 당시 이승만이 하야하자 시위대 속에서 누군가가 맥아더 장군께 가자!”라고 외쳐 인천까지 가서 맥아더 동상에 헌화했다고 한다.
 
맥아더 숭배는 1990년대까지 게속되었다.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신 무당도 여전히 많았다. 1996년에는 대통령 김영삼이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조선일보1964년 사설 내용과 똑같은 취지의 발언을 해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8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규환이 인천 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을 조사했는데 여기서 맥아더는 20.3%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 사실과 달리 고평가된 맥아더, 저평가된 리지웨이

 
2003727일 정전 50주년을 맞이해 724UPI통신이 내놓은 한국전 잊혀진 교훈이라는 제목의 논평 기사는 트루먼과 맥아더 등 한국전을 주도한 전쟁 수뇌부는 당시의 커다란 실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공산화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으로 잘못 평가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휘하 병력 훈련에 만전을 기하지 않아 전쟁 초기 부산을 제외한 남한의 거의 전부를 북한군에 내줬고 중공군의 대규모 진격을 예상하지 못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높이 평가된 반면, 그의 후임인 유엔군사령관 매튜 리지웨이는 전공에 걸맞는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튜 리지웨이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2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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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규환이 인천 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을 조사했는데 여기서 맥아더는 20.3%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는 대목에서는 청소년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대한민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해야 할 것 같다.
 
교육에서 오류를 바로잡지 못했을 때, 신문 등의 언론이 나름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기레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언론의 수준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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