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9일 월요일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지식인들 : 당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려고 한 기득권의 전형

훈민정음 창제 소식이 전해진 두 달 뒤인 세종 26(1444) 220,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 일곱 명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 일곱 명이 공동 연명한 상소문이었다. 이 상소의 소두(상소의 우두머리) 최만리는 지금까지도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역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최만리는 과연 무슨 논리로 훈민정음 창제와 그 반포를 비판했던 것일까? 상소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언문을 제작하신 것은 신묘함이 극도에 달하시고, 만물의 창조와 운행을 잘 아시는 것이 천고에 아득히 뛰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 오히려 의심나는 것이 있어서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펼쳐서 삼가 뒤에 열거했으니 엎드려 성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집현전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임금의 정사에 간쟁(諫諍)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고위 관료는 물론 임금에게도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뜻이다. 간쟁권이 있는 간신(諫臣)들의 간쟁은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자 법이었다. 따라서 최만리가 간쟁한 사실 자체를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논리로 훈민정음 창제를 비판하고 반포의 중지를 요청했는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중화 사대주의 논리였다.
 
우리 조정은 조종(朝宗) 이래 지성으로 사대해서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높여왔는데 지금 같은 글을 쓰고 같은 법도를 행하는 때에 언문을 만드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만약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사대 모화(慕華)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세종은 비록 사대했어도 영토 문제와 관련해서는 조선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적 사대의 태도를 취했지만, 최만리 등은 달랐다. 최만리는 몽골, 서하, 여진, 일본과 서번(西蕃) 등에 그 문자가 있지만 모두 이적(夷狄 : 오랑캐)의 일로, 말할 것이 없다면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중화의 논리로 중국은 종부법인데 조선만 종모법을 실시하는 것을 두고도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일관성이 있다고 평가하겠지만 그런 주장은 한 바 없다.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를 비판한 또 다른 이유는 조선에 이미 이두가 있다는 것이다.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론 천한 시골에서 만들었지만 모두 중국에서 통용하는 글자를 빌려서 말을 도와 쓰게 했으므로 문자(文子 : 한자)와 원래부터 서로 나뉘지 않아서 서리(胥吏), 복예(僕隸)의 무리도 반드시 익히려고 했습니다.”
 
한자를 변용시켜서 만든 이두가 있는데 왜 다시 언문을 만드느냐는 비판이다.
 
이두는 비록 문자(文子 : 한자) 밖의 것이 아닌데도 식자(識者)들은 오히려 천하게 여겨서 이문(吏文 : 이두)을 바꾸려고 생각했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 없고 오직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이두는 한자에서 나왔는데도 식자들은 이두를 바꿔서 모두 한자로 쓰려고 생각했는데, 한자와 전혀 상관없는 언문이야 더 말할 것이 있느냐는 지적이다.
 
이두는 흔히 설총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설총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이 방언(方言 : 신라어)으로 구경(九經)을 읽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라고 기록돼 있고, 삼국유사는 설총의 아버지 원효에 대해 원효라는 말도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 : 신라어)으로 그를 첫새벽(始旦, 시단)’이라고 불렀다라고 설명한다. 설총의 부친 원효를 첫새벽이라고 부르고 시단(始旦)이라고 쓴 것은 설총 이전에 이미 이두 표기법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두로 표현해놓은 사례가 많다. 이두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크게 앞서 있다. 북한의 언어학자 류렬(柳烈)세 나라 시기의 리두에 대한 연구에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실어놓았다. 삼국사기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라고 말하고, 삼국유사혁거세라는 이름에 대해 아마도 향언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言光明理世也)라고 설명했다. 북한 학자 류렬은 ’()밝다’, ‘밝은이라는 뜻이고, ‘’()누리라는 뜻이라면서 혁거세를 밝은 누리’, ‘밝은 빛으로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이를 이두로 표기한 것이 혁거세란 뜻이다.
 
이두를 사용하면 형용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우리말을 한자로 적을 수 있으므로 최만리가 이두가 있는데 굳이 정음을……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유있는 항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과 이두는 그 완성도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또한 최만리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세종은 직접 지은 어제(御製)에서 어린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다라고 창제 동기를 설명했다. 특히 세종은 옥사(獄事)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백성이 문맹일 경우 옥사에서 불이익을 당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정음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만약 형살(刑殺)에 대한 옥사(獄辭)를 이두문으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 차이로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다. 지금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쓰고 읽어서 듣게 한다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기 없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세종실록26220)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주요한 논리 중 하나는 백성들이 소송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수령고소금지법 소송으로 백성들의 반발을 직접 경험한 세종은 백성들이 법조문을 직접 읽을 수 있어야 원통함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최만리 등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반박했다.
 
예부터 중국은 말과 글리 달라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 : 억울하게 잘못된 것)이 아주 많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가 이두를 해득할 수 있어서 직접 초사(招辭 : 범죄 사실을 적시한 글)을 읽어서 거짓인 줄 알면서도 매를 이기지 못해 굽혀 자복하는 자가 많으니, 이는 초사 문장의 뜻을 알지 못해서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비록 언문을 쓰더라도 이것이 무엇과 다르겠습니까? 이로써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지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하려는 것에 대해 신 등은 그 옳음을 볼 수 없습니다.” (세종실록26220)
 
초사(招辭)를 읽을 줄 안다고 해서 모든 죄수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사를 읽을 줄 모르는 것보다는 억울한 일이 줄어들 것은 분명했다. 모든 소송에서 당사자가 소송 문서를 읽을 줄 한다면 보다 공평한 판결이 이뤄지고 억울한 일이 덜 발생할 것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두가 섞인 법률 문서는 사실 한문 못지 않게 어려웠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 법률서는 이두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순전히 한문으로 쓰인 것보다는 낫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 한문이나 이두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상소를 보고 최만리 등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한 너희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 칠음(七音)을 아느냐? 자모(子母)가 몇 개인지 아느냐? 내가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실록26220)
 
집현전 학사들에게 너희들이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을 아느냐?”라고 꾸짖고 내가 아니면 누가 운서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자부할 정도로 세종은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다. 이때 반대 상소에 이름을 올린 집현적 직전(直殿) 김문은 얼마 전 언문 제작에 문제가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렇듯 앞뒤로 다른 말을 할 경우, ‘대제상서사불이실’(對制上書詐不以實)이란 죄에 해당했다. 의금부는 도형 3년에 장() 100대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는데, 세종은 도형 3년은 면제하고 장 100대만 때리라고 감해주었다.
 
세종은 최만리 등 여섯 명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하루 뒤 풀어주었으나 응교(應敎) 정창손만은 파직시켰다. 그렇게 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세종은 재위 16(1434) 역대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실을 한문으로 쓰고 그림을 그려 붙인 삼강행실도를 간행했다. 훈민정음 창제 후 정창손에게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반포하면 민간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창손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한문으로 된)삼강행실도를 반포한 후에도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되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반드시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겠습니까?”
 
세종은 정창손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속유(俗儒)”라면서 파직시켰다. 훗날 정창손은 사위 김질과 함께 상왕 단종 복위 기도 사건을 고변하는 장본인이 된다.
 
훈민정음은 동양 전래의 사상과 음악 체계를 담아 만든 새로운 문자였다. 천ㆍ지ㆍ인 삼극과 음양의 이기와 칠조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칠조란 음악의 음계를 이루는 일곱 가지 소리로 , , , , 다섯 음에 두 개의 변음인 변궁, 변치로 이뤄져 있는데 칠음, 칠성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깊은 사상 체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면서도 배우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28자로서 변환하는 것이 다함이 없어 간략하면서도 적중했고, 정밀하면서도 통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깨우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소송을 들으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다.” (세종실록28929)
 
[이덕일, 조선왕조실록 3 : 세종ㆍ문종ㆍ단종, 22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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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개국된지 100년도 안된 시점에서 내노라하는 학자들은 다들 한자숭배에 몰입해 있었다. 중국을 존중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세종을 공격한 것이다. 이렇게 사대주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인식의 깊은 곳에서는 사대주의를 주장하면서 나름 자신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지키고 행사하려는 욕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에 대해 상소한 것을 살펴보면, 어리석은 백성은 글자를 알 필요도 없는 존재이고, 모든 지식과 정보는 자신들이 독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 역시 중국과의 외교에서 최대한 사대를 통해서 관계를 원만하게 하려고 노력한 군주다. 그런데 세종은 지식과 정보, 권력의 독점에 대해서는 당시 지식인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백성들이 지식과 정보를 창조적으로 생산하는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종은 어려운 한자와 이두로 인해 억울하게 불이익을 당하는 백성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만리 등은 언문이 있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초를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언문으로 인해서 구제될 수 있다면 언문의 존재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정치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만리 등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은 언문의 존재와 상관없이 지켜질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언문 자체의 필요성에 관심조차 없었고, 중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라고 상소했던 것이다.

한편 상소를 올린 신하 중에 김문이라는 자에 대해서는 앞뒤로 다른 말을 할 경우, ‘대제상서사불이실’(對制上書詐不以實)이란 죄에 해당했기에 원칙대로라면 도형 3년에 장() 100대에 해당하지만, 도형 3년은 면제하고 장 100대만 때리라고 감해주었다. 오늘날 정치인들 중에서(특히 국무위원) 앞뒤로 다른 말을 하고도 뻔뻔하게 장관이 되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종 시대였다면 곤장으로 다스렸어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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