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최규하, 증언을 거부한 역사적 증인

최규하(崔奎夏, 1919~2006)

 
  •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
  • 1959년 외무부 차관
  • 1967넌 외무부 장관
  •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 1976년 국무총리
  • 1979년 대통령 직무대행, 10대 대통령
  • 1981년 국정자문회의 의장
  • 1991년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
  • 1992년 안중근 의사, 여순 순국 유적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짧지만 강렬한 사건들의 목격자

 
최규하는 우리 현대사상 매우 중요한 증인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어 사상 초유의 대통령 유고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국무총리로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유신 헌법에 의해 제10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비록 9개월 남짓되는 짧은 기간 동안 대통령직에 머물렀을 뿐이지만, 재임 기간 중 1212517이라는 두 차례에 걸친 쿠데타를 목격했으며, 1980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신군부에 의해 광주에서 자행된 학살을 대통령의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 ‘대통령의 권위를 내세워 광주 민주화 운동 증언을 거부

 
광주 민주화 운동과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구성된 국회조사특위의 조사 요청에 끝내 불응한 그는 역사의 평가를 내세우면서 퇴임 후에야 대통령의 권위를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퇴임 후에 그가 보인 의연함고집을 대통령 재임 기간중에 조금이라도 보여 주었다면 우리의 현대사가 이렇게까지 파행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세간의 논평을 그가 알고나 있는지.
 

# ‘역사적 평가를 내세운 또 한 번의 역사 왜곡

 
대통령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청문회에 서기를 거부한 최규하의 행위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른바 대통령학의 입장에서 최규하의 행위를 전직 대통령다운 뚝심 있는 행위였다고 평가하는 입장도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를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최규하가 대통령직에 머문 9개월간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토록 그가 지키고자 고집했던 이른바 권위의 실체가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운명론, 숙명론적인 세계관?

 
최규하는 퇴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대통령이 될 때의 심정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고, 하기 싫다고 버텨도 안 할 수 없었던것으로 일종의 운명으로 표현한 바 있다. 최규하가 언제부터 이런 운명론, 숙명론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젊은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경고사나 만주대동학원도 그렇고, 관료로의 입신도 모두 그의 의지에 의한 자발적 선택임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만주대동학원에서 정치를 보는 안목을 키웠다는 그가, 왜 대통령의 자리에 앉고부터 유독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할 수 없는 것도 없다는 운명론에 자신을 내맡기게 되었는가.
 

# 격변의 시기에 가장 무능한 대통령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민족은 1026에서 517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에 그야말로 무능하고 주견없는 대통령을 가졌다는 것이 된다. 이야말로 민족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상황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비록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있었지만 직업 관료 출신인 그에게는 1026 이후의 정치적 격변 상황을 주도할 정치력도 정치적 기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존재는 최규하를 말 그대로 권력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킨 결정적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212 쿠데타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에 대한 허가를 9시간 가량 지연시켰음을 내세우면서 최규하는 대통령으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그런 정도를 최선이라 한다면 최규하는 이미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무기력과 대세순응적 태도는 계엄령의 전국 확대를 의결한 516일 밤의 긴급각의에서 재현되며, 광주 진압을 하루 앞둔 525일 저녁 광주 시민을 상대로 실시된 선무방송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이미 강제 진압을 결정한 상황에서 최규하는 광주 시민들을 향해 자제를 촉구하면서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일종의 정치적 기만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816일의 하야 결정은 신군부의 강제 이전에 오히려 최규하 스스로 기다렸던 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대통령의 책임과 자리는 개나 줘버리고...

 
최규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가 겪은 일은 역대 어느 대통령이 겪은 것보다 더 격동적인 것이었다. 1212, 517 두 차례의 쿠데타, 광주항쟁과 학살, 이것만으로도 그는 역사와 민족앞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다. 그의 말대로 이 모든 일들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났고 또 그로서는 사태의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렇다. 대통령의 자리란 그만큼 크고 무겁기 때문이다.
 

# 퇴임 후 찾아먹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그는 퇴임 후 7년 동안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법에 근거해 국민적으로 예우받았다. 국고로부터 매달 786만 원식 지급받았으며 국정자문회의 의장의 직함을 가지고 국가원로로서 대접받았다. 1991년에는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의장직을 맡을 만큼, 국민적 신뢰와 존경도 받고 있다. 아직 누구도 그에게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의장직이 적절한 자리가 아니니 물러나라고 항의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최규하라는 인간에 대해서인가 아니면 대통령이라는 자리 때문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그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그가 대통령 시절을 회고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 ‘숙명적이었다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대접을 사양한 적이 없다. 물론 광주 시민들에게 사과한 적도 없고, 그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학살당하고 다친 사람들과 그 유족들에게 조의를 표하거나 머리를 숙인 적도 없다. 그가 대통령직에서 하야당한 뒤 지금까지 한 일이라곤 국회 청문회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면서까지 이른바 대통령의 권위를 지킨 것뿐이다.
 

# 역사 앞에 증언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그가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의장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다시 한번 절망에 빠뜨린다. 최규하는 최근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직한 시기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잇따르고 있는 데 대해 역사적 평가에 맡기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최규하에게 역사적 평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 또한 그의 시대를 평가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그는 증언을 할 의무가 있다. 적어도 그가 그의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데 대해 동의한다면 그는 자발적으로 증언해야 한다. 또 설혹 그가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사가 요구하고, 국민이 요구하는 한 그는 언제든지 어떤 문제에 있어서든지 그의 시대에 대해, 그가 보고 겪은 일들에 대해 숨김없이 증언해야 한다. 그는 국민 앞에 책임지는 대통령이었으므로... 그것이야말로 그가 강조해 마지않는 역사의 평가에 그가 복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국민은 그의 회고록을 원하지 않는다. 회고록을 쓰든 안 쓰든 그건 그의 자유이지만, 국민적 요구에 응하는 것은 그의 의무다. 그러나 그는 이 의무를 거듭 거부하였다. ‘전직 대통령의 권위를 내세워서.
 

# 바로 세워야 할 역사

 
친일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듭 강조했듯이 친일의 문제는 친미의 문제, 새로운 친일의 문제로 확대되어 왔고 또한 확대되어 갈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민족사를 바로찾지 않는 한, 쿠데타의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는 한, 광주학살의 진상을 실체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역사 속에서 제 위치로 세우지 않는 한, 민족적 정통성은 결코 바로 세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속에 친일의 역사 구조가 재현되고 확대 재생산되어 갈 것이다. 최규하는 전직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 역사 발전의 흐름을 거부했다. 그는 과연 역사의 무게를 아는가 모르는가?
 
-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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