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최규하를 친일파로 볼 수 있을까? - 그에게서 만주국의 DNA를 발견한다

최규하를 친일파로 규정할 수 있는 직접적 증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애써 부인하지 않는 몇 가지 사실을 통해 그의 친일행각과 그를 둘러싼 친일의 역사적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 자랑스런(?) 만주대동학원 출신

 
최규하는 만주대동학원 출신이다. 이 사실에 대해 그는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뒤에 상술하겠지만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이력서에 만주대동학원을 최종 학력으로 기재하였다. 그가 제국대에 버금가는 명문 대학으로 유명했던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생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직업학교인 6개월 과정의 만주대동학원을 최종 학력으로 기재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 만주국 관리를 속성으로 양성하는 학교

 
만주대동학원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한 일제가 세운 것으로 만주국 관리를 속성으로 양성하는 학교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이들은 곧바로 만주국 관리에 임용되었다. 최규하가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국 관리에 임용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록마다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 박정희 쿠데타 이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만주 인맥

 
이상이 최규하의 친일행각에 관련된 직접적인 정황 증거라고 한다면, 최규하가 직업 관료로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1970년대의 활동은 최규하로 상징되는 친일의 역사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최규하의 전성 시대는 곧 만주 인맥의 전성 시대였다.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를 계기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만주 인맥은 유신 독재 체제 시기에 이르러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였다. 최규하는 관료행정 분야에서 만주 인맥을 대표했고,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박정희 사후 많은 사람들이 유신 본당을 자처했지만 최규하야말로 유신 본류, 만주 인맥 본류의 자격을 갖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 최규하가 걸어온 관료의 길

 
최규하는 어려서부터 조부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93214세로 경성제일 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최규하는 졸업 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제3(영문과)에 진학하였고, 동경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2년 뒤인 1943년에는 만주대동학원을 졸업하였다. 해방 후 곧바로 서울사대 조교수로 교편을 잡은 최규하는 1년 후인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최규하는 그후 농림부 양곡과장, 외무부 통상국장, 주일 대표부 총영사를 거쳐 1959년 외무부 차관에 올랐다.
 
419혁명과 516군부 쿠데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외무부 본부대사로 발령받았으며,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외교 정책 실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 직업공무원 출신의 대통령

 
유신 정권하에서도 순탄하게 직업 관료의 길을 걸은 최규하는 1976년부터 박정희가 암살된 1979년까지 국무총리에 재직하였고, 곧 이어 제10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위의 경력으로만 보면 최규하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이색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과장에서 시작해 국장, 차관, 장관, 국무총리를 거쳐 국가원수에 선출된 전형적인 직업공무원 출신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 최규하가 상징하는 친일의 역사 구조

 
해방된 지 48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반민족자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뒤늦게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려는 것도, 숨겨지고 잊혀진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뜻 외에, 지금도 이 땅에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는 새로운 반민족의 문제를 미래지향적으로 극복하자는 뜻이 있는 것이다. 과거의 드러난 친일 못지않게 드러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친일의 구조를 파헤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그만둔 1981년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역임한 뒤, 19912월에는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직에 취임하였다. 또한 199210월에는 안중근 의사, 여순(만주의 지명) 순국 유적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고문을 맡는 등 자못 국가원로에 걸맞는 사회 활동을 펴고 있다. 일본군의 밀정 노릇을 했던 자들이 해방 후 독립 운동가로 돌변하여 독립유공자가 된 판국이니 최규하의 이런 변신이야 꼬집어 말할 게 못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규하 개인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친일의 역사 구조가 이렇듯 민족사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것만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이제 최규하가 상징하는 친일의 역사 구조를 한두 가지 단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 최규하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만주대동학원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최종 학력을 만주대동학원으로 기록하였다. 최규하의 비서관인 최흥순이 쓴 최규하 대통령 약전의 최규하 연보에도 최종학력은 만주대동학원 졸업으로 되어 있다. 최규하는 이 만주대동학원을 졸업하기 전에 이미 동경고등사범학교(이하 동경고사)를 졸업하였다. 최규하가 동경고사를 다닐 당시 1,200명 재학생 중 한국인은 단 두 명에 불과할 정도로 동경고사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일류 학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규하는 다시 6개월 과정의 만주대동학원에 진학하였고, 바로 이 학교를 최종 학력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규하에게 그토록 큰 의미가 있는 만주대동학원이란 도대체 어떤 곳인가?
 
만주대동학원은 1932년 만주국 건국과 동시에 신경(新京)에 세워진 만주국 정부 관리 양성 기관이다. 교육 기간은 6개월밖에 안되지만 교육생 전원을 기숙사에서 생활시켜 교육생 상호간에 깊은 인간적 관계가 맺어지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만주대동학원에는 최규하와 같이 이미 제국대학이나 게이오(慶應) 대학 등의 전문학교 출신들이 많이 입교했는데, 이들은 일단 대동학원에 입학하면 일절 과거의 학력을 묻지 않고 대동학원 동창생으로 대했다고 한다. 그만큼 만주대동학원에 대한 일체감과 자긍심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만주대동학원

 
특기할 것은 최규하가 교육 받았던 1940년대 초반에 이 만주 대동학원의 원장이 일제 육군 중장 출신인 이노우에(井上忠野)였다는 사실이다.
 
만주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 정부로서 한족, 만주족, 몽고족, 조선족, 일본족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5족협화왕도낙토를 통한 이상국가 건설을 이념으로 세웠다. 만주대동학원은 바로 이 만주국의 정부를 책임질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만주대동학원이 이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을 모아 6개월간 집중적인 교육을 시킨 것도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만주대동학원을 졸업했다는 것은 곧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활동할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만주대동학원 출신, 황종률, 권일 그리고 최규하

 
만주대동학원은 19458월에 일제 패망으로 문을 닫기까지 총 19기까지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중 해방 후에도 정치와 관료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사람으로는 3기생 황종률(국회의원, 재무부장관 역임), 10기생 권일(국회의원, 재일 거류민단장) 그리고 15기생인 최규하가 대표적이다.
 
일본인 부인을 둔 권일은 1957년 일본 수상이 된 기시와 손을 잡고 한일간의 만주 인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4년에는 만주대동학원 출신자들의 한일양국 합동동창회를 한국에서 열만큼 기세를 떨쳤다. 최규하가 이 과정에서 한 역할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바로 이 시기가 외무부 장관직에 있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한일간의 만주 인맥이 재구축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최규하는 나는 일본고등사범학교에서 말을 배웠고, 만주대동학원에서 정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다고 술회할 만큼 만주대동학원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잇었다. 이러한 것들이 최규하로 하여금 만주 인맥의 전성기였던 유신 시대의 절반 가량을 국무총리직에 있게 한 인적ㆍ정신적 배경으로 작용하였음은 쉽게 추측이 가는 일이다.
 

# 최규하가 만주국 관리를 했다는 미군정의 보고서

 
물론 최규하가 만주대동학원을 졸업했다는 것 자체를 가지고 친일행위를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 최규하의 사고방식과 정서가 친일적으로 형성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규하가 구체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최근 제시되어 주목을 끈다.
 
미군정 당시 작성된 보고서인 ‘G-2’보고서의 부록 중 최규하 항에 그가 1942101일에서 194375일까지 만주 장춘의 대동학원을 재학, 졸업하고 바로 그 다음날인 194376일부터 1945815일 해방될 때까지 만주국 관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최흥순 비서관이 작성한 최규하 연보에는 공백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다. 그 밖에 최규하에 대한 여러 기록에도 이 시기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2년을 최규하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상식적 추론... 최규하는 만주국 관리를 양성하는 단기 교육 기관인 만주대동학원을 졸업했다. 필자는 앞에서 이 시기의 최규하를 학생 신분으로 서술했지만, 만주대동학원 입교란 사실상 직업 관료에 준하는 사회활동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만주국은 이 학교 출신자들을 거의 대부분 관료로 충원하였다.
 

# 그가 숨겼던 만주국 관리 경력

 
기록에 의하면 최규하는 만주대동학원을 졸업한 2년 후에 해방된 조선에 나타나서 서울사대 교수로 취임했다(G-2보고서에는 서울보통학교 교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1년 뒤부터 군정청 관리로 직업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상식적으로 봐서 최규하가 이 시기, 19437월부터 19458월 사이에 조선에 있었다면 교수나 교사에 상응하거나 최소한 그보다 더 권한 있는 자리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동경고사를 나온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 않을 때였으므로 이는 가장 일반적인 삶의 경로였을 것이다.
 
동경고사와 만주대동학원 경력까지 감추지 않는 그에게는 이 시기에 설혹 총독부 관리를 했다 해도 숨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주국 관리 경력은 그와는 다르다. 만주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 정권이었으며, 당시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침략적이고 배타적인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의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만주국 관리란 곧 가장 침략적인 제국주의 관리였음을 의미한다. 최규하의 연보에 이 시기가 공백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런 정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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