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3일 금요일

이승만은 살아남고 박용만은 잊힌 이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용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절친한 동지였고 미국에서 유학한 뒤 독립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노선의 차이로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습니니다. 이승만의 외교론은 조선의 힘으로는 독립이 어려우니 열강과의 외교 교섭을 통해 그들이 조선을 독립시켜주도록 하자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은 체계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해서 일본과 무력항쟁을 벌일 준비를 해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은 419혁명의 결과 하와이로 쫓겨난 뒤, 비서에게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상대는 바로 박용만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 이승만의 옥중 생활

 
이승만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배재학당을 다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를 통해 일약 청년 지도자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에 박영효 세력들이 꾸민 역모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됩니다. 탈옥을 감행했다가 체포되어 죄가 가중되면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1904년 특별사면을 받고 감옥을 나왔습니다.
 

# 박용만의 옥중 생활

 
박용만은 관립일어학교를 다니다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1901년 귀국 후 박영효와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생활을 몇 개월 하고 나왔습니다. 그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다가 다시 감옥생활을 했는데, 바로 이때 이승만과 만나 옥중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 미국으로 간 이승만

 
1904년 출옥한 지 몇 달 뒤에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납니다. 이때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은 일진회의 대표로 왔고 대한제국 국민은 고종을 지지하지 않으며 러시아보다 일본에 더 우호적이라고 말합니다.
 

# 이승만, 쉽게 받은 학위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외교 임무에 실패한 후 이승만은 워싱턴 D.C.의 유력한 장로교 목사의 추천으로 조지워싱턴대학에 들어갑니다. 이후 학업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음에도 무사히 졸업하고 하버드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합니다. 그는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달라고 우겼지만, 성적 불량으로 석사도 마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2년 만에 파격적으로 학위를 받습니다.
 

# 장인완ㆍ전명운 재판의 통역을 거부한 이승만

 
그는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하버드대학에 석사학위를 달라고 요청하여 계절학기 수업 하나를 이수하는 조건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려 취득한 학위는 평생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는 1908년에 일어난 장인완ㆍ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재판 통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여 한인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 미국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한 박용만

 
한편 박용만은 주로 미국 중부의 네브래스카와 콜로라도를 근거지로 삼고 미국으로 오는 조선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주선하면서 청년들을 규합했습니다. 그는 네브레스카주립대학에 입학했는데, 그 이유는 이 대학에 좋은 ROTC 프로그램이 있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 젊은 학생들이 학기 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에 입소하여 8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그 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기숙사와 학교 시설을 제공받아 한인소년병학교를 이전하여 규모를 확대시켰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의 항의로 1914년 폐교될 때까지 6년간 90여 명의 생도를 훈련시켰습니다.
 

# 박용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설립하다

 
여러 단체로 분립되어 있던 미주 지역의 한인 조직들은 마침내 1910년 대한인국민회(국민회)로 통합되었습니다. 박용만은 이때 백성은 있으나 토지가 없어 남의 토지 위에 만든 국가라는 의미의 무형국가’(無形國家)를 조직하기 위해 1911년 신한민보 주필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중앙총회를 설립하는데 전력합니다. 그가 주도한 헌장은 사실상의 헌법으로 국민회 중앙총회가 해외 한인의 대표기구이면서, 대한제국을 대신한 민주주의 정부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공화주의 선언이었습니다.
 

# 이승만, 귀국했다 다시 미국으로

 
한편 이승만은 1910년 귀국하여 신변보장을 받으며 YMCA에서 종교활동과 교육활동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중 105인 사건이 터지자 위협을 느낀 그는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912년 세계 감리교대회에 조선 대표로 선발되어 다시 미국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는 미국에 도착한 후 일본의 조선 통치를 비판하기는커녕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사회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며 오히려 찬양했습니다.
 

# 하와이에서 자치제도를 실현하고자한 박용만

 
당시 하와이는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노동자로서 이민을 통해 들어온 이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줄 사람으로 박용만을 초청했습니다. 박용만은 1912년 말에 성대한 환영식을 치르고 본격적으로 하와이에서 자치제도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와이 한인지방총회를 법인으로 등록하고 특별경찰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국민의무금제를 도입해 재정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그는 1914년 앞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력을 양성하기 위한 대조선 국민군단과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교민들은 노동하는 틈틈이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한제국군인 출신의 교관들이 주도하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박용만

 
미국에 왔다가 귀국을 포기하여 오갈 데 없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해 준 이는 박용만이었습니다. 그는 1913년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성대한 환영행사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창간한 태평양잡지를 후원했습니다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그러나 파국은 곧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주도권과 돈 때문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여자 기숙사를 짓겠다며 모금을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자, 국민회의 부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전시켜 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회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다음 해에는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는 국민회를 강하게 공개 비판하고 각 지역을 돌며 추종자들을 모아 박용만 지지파에게 테러를 자행하면서 국민회를 장악합니다.
 

# 하와이에서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

 
이때 박용만은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치러진 국민회 중앙총회 선거에서 부회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회장으로 당선된 안창호는 이승만을 만나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하와이를 직접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피해 넉 달간이나 잠적해버렸고 안창호는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이승만의 탐욕은 국민회와 박용만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해 놓은 조직과 재정을 송두리째 파탄 냈습니다. 결국 하와이 한인의 최고 기관이자 자치정부로 자리 잡아가던 국민회는 이승만 개인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191610월 하와이 현지 신문에 자신은 반일교육을 하고 있지 않으며 한인사회에서는 어떤 반일적 언급도 하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다는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 이승만, 자신의 부정행위를 감추기위해 항일운동을 방해하다

 
그 후 1918년 회계감사에서 이승만의 부정이 드러나자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했고 이승만은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인사들을 폭동죄 및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이승만은 법정에서 그들이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어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고 일본 함선을 파괴하려는 무리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두 모함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살인미수 혐의는 기각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행위를 감추기 위해 항일운동의 성과를 해치는 것마저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박용만은 1918년 이승만의 독선과 야욕을 비판하며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하와이 한인사회는 양분되고 말았습니다.
 

# 임시정부의 대통령, 논란의 위임통치 건의

 
이승만은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안이 나오자, 이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자임하였고 이를 승인하도록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국채발행권을 고집하면서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상하이에서의 집무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상하이에 나타난 것은 192012월부터 19215월까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위임통치 건의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여 갈등만 벌이고 몰래 돌아갔습니다.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배신했던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강심장의 소유자였습니다.
 

# 이승만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판한 박용만

 
하지만 박용만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무장투쟁세력을 규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자신은 군사노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취임을 거부한다고 밝혔습니다. 베이징을 거점으로 이회영, 신채호 등과 함께 1921년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고, 이승만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된 박용만

 
그후 군사기지 건설 자금을 모으고 중국 군벌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1928년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에 의한 참극이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 이승만의 뒷북성 군사부대 창설 제안

 
한편 이승만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측에 한인 군사부대 창설을 제안합니다. 박용만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1910년대부터 준비했지만 이승만에 의해 뿌리가 뽑힌 노선이었습니다. 이승만의 방해와 파괴공작이 없었다면 박용만이 양성했던 조선인 군사력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낼 것이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승전국의 대우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국 박용만은 이승만과의 대립, 나아가 노선이 달랐던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갈등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잊혀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진오, 주진오의 한국현재사, 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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