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이승만과 김성주 살해 사건의 진실, 백범 암살의 진실을 덮기 위하여?

김성주(金聖柱, 1924229~ 1954328)
 

# 반공단체의 선봉장, 김성주

 
19544월에 일어난 김성주 살해 사건은 왕년의 반공투사일지라도 이승만의 눈 밖에 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김성주는 평북 강계 출신으로 월남 청년들로 구성된 평양청년회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서북청년회 등 반공 청년단체의 최선봉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다. 그는 625 당시 켈로 부대를 이끌고 대북공작에 공을 세웠고, 이 때문에 유엔군 북진시 유엔군의 임명에 의해 잠시 평남지사를 맡기도 했다.
 
평양(平壤) 출생.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8·15광복 후 평안청년회(平安靑年會)ㆍ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등을 조직하여 청년운동지도자로 활약하였고, 6·25전쟁 때는 의용호림부대(義勇虎林部隊)를 조직하여 북한군과 싸웠으며, 북진 후에는 평남 도지사가 되었다. 그후 민주당(民主黨)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5·15선거 때는 조봉암(曺奉岩)의 선거운동을 벌이는 등 야당운동을 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들다

 
그러나 그는 이때에 이승만이 직접 파견한 인물들과 갈등을 빚어 이승만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김성주는 이때의 갈등으로 이후 이승만 지지 노선에서 이탈하였다. 그는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는가 하면 1952년 선거 때엔 조봉암의 선거 사무차장으로 뛰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반공 포로 석방을 비판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승만이 싫어할 일만을 골라서 한 셈이었다.
 
김성주의 그런 행동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그리고 서북청년회 시절의 동지이자 경쟁자이며 이후 치안국장을 지낸 문봉제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도 김성주를 배신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 ‘국가변란 및 이승만 대통령 암살음모 혐의로 구속되다

 
김성주는 1953625국가변란 및 이승만 대통령 암살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수사는 헌병총사령부가 맡았다. 처음 신문의 초점은 주로 반공 포로 석방을 비난한 조병옥과의 연계였다. 그러나 조병옥은 김성주가 한창 심문을 받고 있던 중인 720일에 석방되었기 때문에 심문의 초점은 조봉암과의 연계로 달라졌다.
 

# 김성주의 구속은 김지웅의 제보에 의한 것

 
김성주의 구속은 김지웅이라는 사람의 거짓 정보 제공에 원용덕이 넘어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설도 있다. 원용덕은 나중에 그 정보가 날조되었다는 걸 알고서도 일단 이승만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한 일이라 사건을 조작하는 쪽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지웅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경남에 따르면,
 

# 김구 암살범 안두희와 연관

 
헌병총사령부에서 정보 제공자 김지웅에 대해 추궁을 해보니 그의 배후에 안두희가 있음이 떠올랐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가 무기징역수에서 특사되어 육군 소령으로 거들먹거리고있을 때 그 사실을 떠들어대 여론화시킨 장본인이 바로 김성주였으며, 따라서 안두희는 김성주에 대한 원한 보복으로 김지웅과 쑥덕거렸다는 것이다.”
 

# 김성주의 제거를 지시한 이승만

 
정부는 김성주에 대한 사형을 기대했으나 군법회의에서 7년을 구형하자 이승만은 재판장인 원용덕에게 영문 메모를 보냈다고 한다. 원 장군, 김성주는 반드시 극형에 처해야 한다”(General Won, Kim Sung Ju must be sentenced to capital punishment) 그리고 메모 마지막에는 아주 신속하게, 아주 조용하게”(Without delay, without noise)라는 말이 덧붙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경남에 따르면,
 

# 원용덕의 고민, 김성주의 제거

 
원용덕으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7년이 구형된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는가. 당시 원용덕은 라이벌인 김창룡의 특무대가 뒤를 밟는 등 자리가 다소 불안했다. 국방부장관 손원일과도 매끄럽지 못한데다 과거 박마리아를 놓고 이기붕과 각축을 벌인 일이 있어 누구 하나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믿는 것은 오로지 대통령뿐이니 그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김성주 처형 건은 원의 부하인 김진호가 맡았다. 그는 헌병 총사령관이 더 수사할 게 있다며 육군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김성주를 끄집어낸다. (법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는 그 날 사령관 숙소에서 사살해 버린다.”
 
[1954328일을 기하여 육군형무소에서 당시 육군본부 헌병차감이었던 김진호(金鎭浩) 육군 중령에게 김성주(金聖柱)는 신병 인수 조처되었다.]
 
1960730, 김성주살해사건으로 구속된 김진호는 김성주를 직접 죽인 것은 원용덕의 호위병인 임 모 상사였고, 본인이 직접 살해현장에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김진호는 1954416일경, 임 상사·목 중령과 함께 육군형무소에 있던 김성주를 끌어내 원용덕의 집 정원에 있는 천막으로 끌고 갔고, 그 후 임 상사가 김성주의 뒤통수를 향해 권총을 쏘아 김성주가 즉사했다고 하였다. 원용덕은 이 사실을 보고받고 증거인멸을 위해 화장(火葬)을 지시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1960. 7. 31 3; 동아일보는 김성주가 살해된 날짜를 1954616일경으로 보도했는데 416일이 맞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 시체에 사형선고를 내림

 
그게 416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비밀로 파묻혀졌다. 군법회의는 195456일에 김성주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고, 529일에 그의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발표했다. 시체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린 셈이었다. 김성주를 죽인 것은 그가 고문을 너무 많이 당해 실명 상태에 이르는 등 너무도 처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걸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이후의 원용덕

 
김성주의 시신은 약 2개월 동안 원용덕의 집 방공호에 묻혀 있다가 610일경 화장되었다. 이 사건으로 원용덕은 1960729일 헌병총사령관직에서 해임 당하고 83일 구속돼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중간에 특사로 풀려났으며, 1968224일에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1960829일 오후, 현석호 국방부장관은 김성주살해사건의 살인 및 시체유기죄로 구속된 전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을 군법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조선일보1960. 8. 30 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세월이 흘러 내가 만년대령 9년만에 4·19 덕분으로 별하나 얻어달고 제8대 법무감으로 취임한지 얼마 안된 1960919, 원용덕 장군은 살인 혐의를 받는 피고인이 되어 내가 주관하는 중앙고등군법회의 법정에 서게됐다. 이 대통령이 반역자로 지목했던 김성주를 살해한 사실이 4·19 후 유가족들의 재수사 탄원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음으로 법정에 섰던 날로부터 1년여가 되던 1961930, 피고인 원용덕은 또다시 같은 법정에 섰다. 자기가 저지른 살인죄의 판결을 선고받기 위해서다.
그날로부터 9년전, 부산 정치파동 때 자기가 이승만 대통령의 政敵 서민호 의원을 살인죄의 피고인으로 세웠던 군법회의 법정이었다. 6년 전에는 이승만의 메모 지시에 따라 김성주를 살인예비죄 등으로 서게했던 군법회의 법정이기도 했다.
그 군법회의 법정에 그날은 자신이 역시 살인죄의 피고인으로서 마지막 판결선고를 받기 위해 서 있는 것이었다.
피고인 원용덕을 징역 15년에 처한다.”
재판장 장창국 장군의 엄숙한 판결선고 주문이었다.
동기가 불순하고 방법이 잔인하고 범행후의 정상 또한 참작할 여지가 없는 살인죄로서는 그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비난을 예상했던 것일까. 판결은 그 이유에서 피고인의 創軍 및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공로를 참작했다고 밝히고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압력으로 감행되었다는 점 등의 정상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세 개의 별이 양어깨에 빛나고 왼쪽 가슴엔 오색 훈장도 찬란한 군복을 입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세는 어디로 가고 15년 징역형이 선고된 피고인 원용덕은 푸른 囚衣를 걸친 囹圄의 몸이 되어 영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김태정 전 변협회장의 회고]
 
포병사령관 장은산 휘하에 있던 장군 이기련은 419후 원용덕 사건에 대해 조사를 받으면서 신문 기자에게 김성주는 김구 선생 사건의 내막을 알기 때문에 이 박사가 죽였다고 본다고 진술했다.
 
한편 김성주의 죽음도 백범 암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이승만의 사후개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안두희 재판 당시 서북청년당 부단장이었던 김성주는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라는 삐라를 법원 근처에 붙여놓는 등 안두희의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의 북진시 유엔군의 임명으로 잠시 평남지사를 역임했지만,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연을 임명하여 이대통령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후 1952년 대통령선거 때는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돕는 등 반이승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김구 암살의 배후자인 김지웅의 허위정보로 1953625일 국제공산당원 혐의와 이승만 암살 예비죄로 헌병총사령부에 구속되었다. 그리고 군법회의에서 7년형이 구형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영문으로 된 메모를 보내 김성주를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김삼웅]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2, 18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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