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박정희 정권의 친일 인맥과 최규하 대통령의 탄생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를 계기로 만주 인맥은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이 만주의 인맥이 곧 유신 독재 체제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규하는 관료행정 분야에서 만주 인맥을 대표했고,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 박정희 쿠데타 이후 등장한 만주 인맥의 세 갈래

 
만주 인맥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박정희를 배출한 만주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만주 군맥, 1930년대 후반부터 집중적으로 투입ㆍ육성된 만주국 관리 출신들, 그리고 만주대동학원 출신 인맥이 그것이다.
 

1) 만주군관학교 출신

 
일본에서는 만주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만주군 장교 출신자들이 1953난성회를 결성했는데, 이 모임에는 한국인들도 다수 참여했다. 박정희는 난성회의 한국동창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정일권(대장, 국무총리 역임), 백선엽(대장, 육군 참모총장 역임) 등도 여기에 가입하였다. 또한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김동하(중장, 최고회의 외교국방위원장 역임), 윤태일(중장, 서울시장 역임), 이한림(중장, 건설부 장관 역임) 등은 박정희 정권 때 최상층부의 지배층 엘리트군을 구성하였다.
 

2) 만주국 관리 출신

 
한편 1930년대 후반부터 부쩍 강조된 내선일체’, ‘선만일여의 기치 아래 고시출신자들이 대거 만주국 관리로 파견되었다. 진학문(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참사관), 윤상필(흥농부 개척총국 고위관료) 이범익(도지사), 유홍순(강원도지사), 윤태동(간도성차장), 최남선(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등이 이에 해당된다.
 

3) 만주대동학원 출신

 
한편 이들과는 달리 만주대동학원 출신자들은 상대적으로 연배가 낮았던 관계로 고위직으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해방 후의 변신이 훨씬 용이하였고, 그에 따라 해방 후 친일 인맥의 주요한 구성 인자들이 되었다.
 

# 유신 체제를 떠받치는 만주 친일 인맥

 
그리하여 결국 박정희 정권하에서 전면적으로 재건된 만주 친일 인맥은 만주군관학교와 만주대동학원, 이 두 기관 출신자들로 이루어졌다. 유신 체제의 권력 구성이 보여 주듯이, 만주군관학교 인맥은 쿠데타를 통해 직접 정치 권력을 장악한 반면, 만주대동학원 인맥은 관료ㆍ재계와 학계 등으로 진출해 유신 체제를 떠받치는 강력한 사회ㆍ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므로 친일 인맥을 구조화하는 사회적 힘이 되었다.
 

# 친일의 구조를 재건ㆍ확대 재생산한 박정희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근거로 전격적으로 체결된 한일협정은 63학생 운동으로 상징되는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나 박정희 정권은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그 위에 박정희 정권은 친일의 구조를 재건ㆍ확대 재생산하였다. 박정희 스스로가 쿠데타 직후 일본에 들러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과 동기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메이지 유신의 지사가 된 심정으로 일을 한다고 호언할 정도로 친일적 성향을 가졌던 만큼 국교정상화 이후에 정치권과 재계, 사회전반에 친일 인맥이 재건되고, 친일의 구조가 재현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 친일 구조의 핵심 한일의원연맹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한일의원연맹, 한일협력위원회, 한일민간합동경제위원회, 한일친선협회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물론 한일의원연맹이다. 김종필, 박태준을 거쳐 김윤환이 한국측 회장을 맡고있는 한일의원연맹은 가장 광범위한 조직을 갖고 있으며,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주로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직업 관료였던 최규하가 이 단체들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다만 이 시기에 최규하가 외무부 장관(19676~ 19716)과 대통령 외교담당특별보좌관(19716~ 197512)을 지냈으므로 한ㆍ일간의 친선이 복구, 진전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리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 친일 인맥이 배출한 유능한 직업 관료, 최규하

 
친일 인맥은 박정희 정권기에 정ㆍ재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재구축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만주 인맥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최규하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정서와 배경 위에서 박정희 정권 18년간 직업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으며, 무려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국무총리로 있다가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직업공무원, 그것도 직업외무관료 출신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던 이례적인 사건도 이렇게 보면 결코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던 친일 만주 인맥이 배출한 유능한 직업 관료였으며, 직업 관료의 정점에서 만주 인맥을 기반으로 하여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다.
 
-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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