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5일 일요일

1954년 5월 20일, 제3대 총선 :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를 위하여

이승만은 1954520일로 예정된 제3대 총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311일에서 517일까지 11차에 걸쳐 선거 관련 담화를 발표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는 1952년 발췌개헌 때 2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싶었지만 당시 여건이나 분위기상 그것까진 못한 터라 그 일을 해내야만 할 3대 국회에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 자유당 공천 :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해라

 
520 총선에선 최초로 정당이 각 선거구마다 1인의 후보를 공천하는 공천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승만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였다. 46일 이승만은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자유당에선 개헌 지지는 공천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 곤봉선거 : 야당표는 공산당 지지로 인정한다!

 
520 선거는 경찰의 곤봉이 당락을 결정했다고 하여 곤봉선거로 불리었다. 지서주임만 되어서 시골에서는 산골 대통령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경찰은 마을 반장회의 등을 열어 야당은 반정부당으로 공산당보다 더 나쁘며, 공산당보다 더 나쁜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면 너희 마을은 공산당 소굴로 본다. 너희 마을 표가 120인데 야당 표가 한 표라도 나오면 너희 부락에 공산당이 하나 있고, 열이 나오면 열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식의 협박을 일삼았다.
 

# 조봉암, 후보등록을 하지 못하다

 
도시에서는 후보 등록 방해 수법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로 까지 나섰던 조봉암조차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조봉암은 520 총선을 염두에 두고 19543월 정치 활동에 대한 자신의 기본 노선을 밝힌 우리의 당면 과업을 발표하는 등 총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선거 공고 후 10일간의 후보등록 기간 동안 조봉암은 도무지 등록을 할 수가 없었다. 조봉암은 처음에는 인천 을구에 낼 입후보 등록서류를 갖추었으나 도중에 탈취당하였고, 그래서 서울 서대문구와 부산에서 양면작전으로 등록을 시도하였지만, 부산에서도 실패하였고, 이어 서대문 을구에서도 실패하였다.
 
서대문 을구는 자유당의 실력자 이기붕이 출마한 지역이었다. 자유당은 어떤 식으로 등록을 방해하였던가? 당시의 독특한 선거등록 제도도 문제였지만 문제의 핵심은 노골적인 힘의 행사였다. 조용중에 따르면,
 
“100여 명을 필요로 하는 유권자의 추천장을 받는 것을 힘으로 훼방하거나 요행히 받았다 하면 등록 직전에 추천을 취소한다는 연락을 선거위원회에 하는 식이었다. 거의 마감이 다 돼서 조봉암은 참다 못해 직접 서대문 을구 선거위원회를 찾아갔다. 추천장에 도장을 찍은 유권자가 실재 인물이냐, 정말로 조봉암을 추천했느냐 하는 것을 선거관리위원회의 말단 서기가 심사를 한다고 등록서류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조봉암은 국회 부의장이었다. 그 면전에서 서대문 을구 선거위원회의 서기는 한 사람의 유권자를 심사하는데 심한 경우는 한 시간 이상을 끌었다. 조봉암은 기가 막혔지만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마침내 등록 마감 시간인 하오 5, 서대문 을구 선거위원회는 마감 이전에 등록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봉암의 실격을 선언해 버리고 말았다. 국회부의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고 대통령 선거에도 입후보했던 조봉암을 앉혀 놓고, 국회 진출을 막아버린 것이다. 치가 떨리고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의 횡포였지만 조봉암은 그 자리에서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말단 서기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차라리 체념을 해버린 것일까.”
 
조봉암

# 신익희, 선거운동을 방해받다

 
자유당은 어떤 후보에겐 유세 방해 공작을 펼쳤다. 경기도 광주에 후보 등록을 마친 신익희는 경찰의 방해로 도무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선거운동원들에 대해 산림령 위반, 밀주, 가축 밀도살, 병역기피 등으로 엮어 넣거나 위협하여 발을 묶었다. 그래서 서울시민들에게 낮에 트럭을 타고 광주에 가서 선거운동을 하고 밤에 귀가하는 희한한 선거운동을 펼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 자유당의 압승

 
자유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곤봉선거의 효과를 보았다. 전국 203개 선거구 중 자유당이 114(56%)의 당선자를 낸 것이다. 그밖에 민국당 15, 대한국민당 3, 국민회 3, 무소속67, 제헌국회의원동지회 1 등이었다. 이 선거에선 자유당은 36.8%의 득표로 114석을 확보하고, 무소속은 47.9%의 득표로 67석을 차지하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의 과다대표, 과소대표 현상이 나타났다. 국회의장에는 이기붕(자유당), 부의장에 최순주(자유당)와 곽상훈(무소속)이 선출되었다. 이기붕은 국회 개원 이래 최초의 여당 출신 의장이었다.
 
520 총선의 이색적인 당선자는 조병옥, 김두한, 김영삼 등이었다.
 

# 조병옥, 대구 을구에서 민국당 후보로 당선되다

 
조병옥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까지 몰리는 등 한심한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껴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자신의 선거구인 성북에 서범석을 출마토록 했었다. 그러자 대구에서 민국당 간부들이 올라와 대구 출마를 간곡히 종용했다. 625 때 내무부장관으로서 미 8군 사령관 워커와 담판을 해 대구를 사수한 공을 대구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조병옥은 대구 을구에서 민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 무소속의 무식한 김두한, 당선되다

 
김두한은 36세의 젊은 나이로 종로 을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의 경쟁자들이 김두한은 소학교 2학년밖에 못 다닌 무식쟁이요, 주먹대장이다라고 공격하자, 김두한은 이렇게 되받았다

이분들은 유식만을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국회의원 전원을 대학총장으로 갖다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이 대학에서 배운 교과서를 쌓아놓아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분들의 유일한 밑천이지만 고대 광실 높은 집에서 계집, 자식과 따뜻한 생활을 하고 자동차만 타고 다니는 이 자들이 어떻게 서민감정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 최연소 당선자, 경남 거제군의 김영삼

 
520 총선의 최연소 당선자는 경남 거제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한 26세의 청년 김영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책상 앞에 써붙여 놓고 대통령 꿈을 키워온 김영삼 학생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웅변 연습이었다.
 
정치를 꿈꾸던 나는 웅변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기 중에는 학생 몇 명이 모여서 웅변 연습을 했고, 방학 때는 귀향하여 바닷가나 뒷산에서 큰소리를 질러 보곤 했다. 연습으로 자신을 갖게 된 나는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 2등을 차지했다.”
 
김영삼이 잘 깨닫고 있었듯이, 당시의 주요 공공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대중연설이었다. 대중연설은 삶의 피곤에 찌들은 민중에게 좋은 엔터테인먼트이기도 했다. 예컨대, 중간파 정치인이었던 원세훈은 1950530 선거에서 서울 중구 갑구에 입후보해 서울시장을 지낸 바 있는 윤치영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는데, “대중연설 솜씨가 뛰어난 그가 사자후를 토할 때 청중들은 박수로 모자라 발을 굴렀다고 한다.”
 

# 김영삼과 장택상과의 인연

 
김영삼이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받은 2등상은 외무부장관상이었는데, 당시 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그 인연으로 김영삼은 서울대 3학년 재학중이던 19504월 초순에 장택상의 요청을 받아 장택상의 지역구인 경북 칠곡에서 웅변으로 장택상 선거운동을 도와주었다. 또 이게 인연이 돼 김영삼은 얼마 후 장택상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김영삼, 1951년 2월 서울대 졸업식


1952524일 이승만이 총리를 장면에서 장택상으로 바꿨을 때 장택상은 자신이 이끌고 있던 신라회 회원 21명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려놓은 바 있었다. 신라회는 영남 및 대한청년단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 신라회의 운영을 도맡다시피 한 사람이 바로 장택상의 비서인 김영삼이었다.

장택상
 

# 김대중의 목포 출마, 그리고 낙선

 
먼 훗날 김영삼의 정치적 라이벌이 된 김대중도 520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목포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김대중은 승리를 자신했었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막강한 힘을 지닌 노동조합이 나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힘을 등에 업고 선거를 치른다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나는 안심했다. 그런데 이때 목포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본래 노동조합은 여당인 자유당을 지지하는 기간단체 중의 하나였다. 그 점을 들어 자유당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노동조합이 기간단체인 주제에 왜 자유당에서 공천한 후보가 아닌 무소속 후보에 대한 지지로 조직의 입장을 결정했는가?’라고 하면서 노동조합 간부 전원을 체포한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당시에는 흔했다. 경찰은 체포한 토조 간부 전원을 구치소에 가둔 채 한 사람씩 불러냈다. 그리고 김대중 지지를 중단하고 자유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각서를 모두에게서 받아낸 다음 그들을 석방했다.”
 

# 최단명 국회의원 김대중 : 3일 천하

 
김대중은 1961년 강원 인제의 보궐선거로 비로소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당선 3일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채 최단명 국회의원 기록을 세우게 된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2, 18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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