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였다.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날 저녁 공산군들은 모든 전선에서 불꽃과 신호탄을 하늘에 올렸으며 각 병사는 죽은 독재자에 대한 고별 인사로 동시에 공중을 향하여 조총 사격을 하였다.
#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 지도층의 태도 변화
스탈린 사망은 “동서해빙과 외부 세계에 대한 소련 지도층의 새로운 접근 방식과 태도 변화를 초래했”다. 3월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한국전을 계속 수행하는 것은 소련과 중국, 북한의 이익에 배치된다”며 이른 시일 내에 정전협상을 마무리지을 것을 결정했다. 이 소식에 접한 김일성은 “드디어 전쟁 종결과 평화 달성의 주도권을 잡을 시기가 왔다”며 좋아했다.
정전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한 상태였다.
# 부상 포로의 우선 교환에 합의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미국은 이미 53년 2월 22일에 “우선 부상 포로부터 교환하자”는 제의를 한 바 있었는데, 이를 소련측이 수용한 것이다... 4월 11일 그간 협상을 가로막아 왔던 ‘부상 포로 교환협정’이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4월 20일과 5월 3일 사이에 유엔군은 북한군 포로 5천 194명과 중국군 포로 1천 30명을 송환하였으며, 공산군측은 국군 포로 471명과 유엔군 포로 149명을 송환하였다.
# 포로 교환에 대한 절충안
이제 남은 건 포로 교환 문제였다. 부상 포로 교환 합의 후 미국측은 공산군측의 제의를 절충하여
-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4만 7천명의 포로를 인도ㆍ체코ㆍ폴란드ㆍ스웨덴ㆍ스위스 등 5개의 중립위원국의 관리하에 둔다,
- 인도군이 이들 포로가 남한에서 중립국 관리하에 있을 동안 감시 임무를 맡는다,
- 약 190명의 공산측 대표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4개월간 포로들에게 송환을 설득하도록 한다,
- 포로 문제의 타결이 불가능할 경우 정치적 망명처를 요구하는 포로들에게는 유엔 총회가 자유 세계에 거처를 정하도록 주선해준다는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 주은래의 타협안과 미국의 수용
주은래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즉각 송환하고,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일단 중립국인 인도 쪽에 넘겨 처리하도록 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미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6월 8일에는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2권』, 19-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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