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0일 화요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태어나 포르투갈에서 선원생활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도 신세계에 도전한 탐험가 중의 한 명이었다.

 

# 콜럼버스,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후원을 받다

 
콜럼버스는 여러 해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에스파냐), 프랑스, 영국의 왕들을 찾아다니면서 후원을 요청했지만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때마침 스페인의 강력한 두 지도자였던 아라곤(스페인 북동부 지방)의 페르난도(Ferdinand II, 1452~1516)카스티야(스페인 중부와 북부의 고원지방)의 이사벨라(Isabella, 1451~1504)의 결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1492년 초 그라나다(당시 이베리아 반도에 남은 이슬람세력의 최후 거점으로 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를 탈환한 뒤 새로운 교역을 위한 모험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후원을 받아 콜럼버스는 149283, 9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니나, 핀타, 산타마리아)로 스페인의 팔로스(Palos)항을 떠나 대서양을 향해 서진했다. 기함은 산타마리아호였다. 그는 탐험에서 얻는 이득이 10퍼센트, 새로 발견될 지역의 총독직, 그리고 바다의 제독이라는 직책 등을 약속받았다.
 

# 지구는 둥그니까 서쪽으로 가면 동양에 갈 수 있다!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동양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중국과 인도 제도로 통하는 직항로였다. 그는 북위 28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마르코 폴로의 그 전설적인 지팡구(Jipangu, 일본)가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는 거리상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2400마일(3863킬로미터)로 알고 있던 항로는 비행기로도 1600마일(2575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였다.
 

# 쉽지않은 탐험길, 선원들을 속이다

 
콜럼버스와 같은 탐험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을 두려워하는 선원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그런 통제의 일환으로 그는 항해일지를 거짓 기재하였다. 항해거리가 길면 선원들이 겁을 먹고 실망을 해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항해를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자 항해일지의 조작만으로 선원들의 공포감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느날 콜럼버스는 공포에 술렁이는 선원들에게 딱 사흘만 참아달라고 호소했다.
 

# 산살바도르에 도착하다

 
실제로 그로부터 사흘 뒤, 항해를 시작한 지 70일 만인 1012일 새벽 2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콜럼버스를 막 위협하려는 찰나에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스페인 왕은 육지를 처음 발견하는 자에게 큰 상금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했었는데, 콜럼버스는 그 육지에 어른거린 달빛은 전날 밤 자기가 본 것이라고 우기며 나중에 상금을 착복했다. 그는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로 부르는 그 육지를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로 명명했다. 그리고 그곳에 나비다드(Navidad, 성탄절)라는 성채를 구축했는데, 이는 아메리카에 세워진 최초의 유럽 거점지였다. 콜럼버스가 처음 만난 원주민은 바하마 제도의 아라와크족(Arawaks)이었다.
 

#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믿었던 콜럼버스

 
콜럼버스는 자신이 아시아의 어느 섬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이어 그는 쿠바와 또 하나의 커다란 섬에 도착해 그곳을 에스퍄놀랴(‘작은 스페인이라는 뜻으로 오늘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라 불렀는데, 이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인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쿠바가 섬인지도 몰랐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해서 처음 도착한 섬들을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 다시 스페인으로...

 
이제 문제는 어떻게 스페인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항해는 바람의 게임이었다. 항해술은 바람의 방향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데 달려 있었다. 콜럼버스는 무역풍을 따라 서인도 제도까지 왔지만, 다시 무역풍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바람의 현자답게 북쪽으로 옆걸음질하여 편서풍이 부는 위도로 간 다음 아조레스 제도를 향해 동쪽으로 항해하는 길을 찾아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업적을 증명하기 위해 몇 명의 원주민들을 잡아서 14933월 스페인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데에 성공했다.
 

# 포르투갈과 스페인, 신세계를 둘러싼 이권협상

 
스페인의 군주들은 그를 성대히 맞아주었다. 그들은 교황을 압박하기로 작정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다는 그럴 듯한 구실 아래 새로 발견한 땅의 소유권을 자신들 앞으로 해줄 것을 교황에게 간청했고, 이에 교황도 동의했다. 그러자 포르투갈이 반발했고 두 나라 사이에서 신세계를 둘러싼 이권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에서 경도를 기준으로 삼아 브라질 지역이 포르투갈에 편입되었는데, 오늘날 중남미에서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콜럼버스 두 번째 항해

 
콜럼버스는 1년 후 다시 탐사를 떠났다. 두 번째 항해엔 배 17척과 선원 1500명을 제공받는 등 이전보다 규모가 훨신 더 커졌다. 그는 에스파뇰라에서 타이노족(Tainos)인디언들을 금 찾는 부역작업에 동원했다.
 

# 원주민들에겐 재앙이었던 콜럼버스 일행

 
인디언들에게 더 큰 재앙은 질병이었다. 면역력이 없는 그들은 콜럼버스 일행이 들여온 전염병에 걸려 쓰러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금을 찾지 못하자 금을 대신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콜럼버스는 노예사냥에 나섰다. 스페인으로 이송할 500명의 노예를 포획했는데, 그 가운데 200명은 항해 중에 죽었고 나머지는 스페인에 도착해 한 지역교회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늘 종교적인 말을 많이 했던 콜럼버스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잘 팔릴만한 노예들을 게속해서 공급해 주자.” 

아이티에는 약 26만 명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지만 2년 후 절반으로, 1550년경엔 5만 명으로 줄었고, 오늘날엔 완전시 씨가 말라버렸다. 그들에게 콜럼버스는 재앙 그 자체였다.
 

# 산토도밍고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다

 
콜럼버스가 이 두 번째 항해 시 아프리카 서해안 앞바다에 있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서 사탕수수를 가지고 들어가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현재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재배하도록 했다는 것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당시 설탕은 향신료였으며 의약품, 그것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산토도밍고에서 재배된 사탕수수는 1516년경부터 배로 유럽으로 운송되었다. 설탕이 호사품과 희귀품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들의 일상적인 필수품으로 변한 건 1650년 이후였다.
 

# 세 번째 항해, 트리니다드 섬을 발견하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자 콜럼버스의 평판은 추락했다. 그가 1498530일 세 번째 항해에 나섰을 때엔 배도 6척으로 줄었고, 선원을 지원받는 것도 어려워 부족한 선원을 사면된 죄수들로 보충했다. 이번엔 남쪽으로 항해해 지금의 베네수엘라 해안에 닿았다. 세 번째 항해에서 그가 최초로 발견한 섬은 트리니다드(Trinidad) 인데, 그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기념하여 이 섬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 비참한 말년... 최후...

 
그러나 콜럼버스의 신은 콜럼버스를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선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콜럼버스를 족쇄에 채워 스페인으로 보내버렸다

그는 스페인에서 기존 직책을 거의 박탈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었지만, 다시 불굴의 의지로 1502년 배 네 척과 열네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네 번째 항해에 나섰다. 그는 파나마지협에 닿았지만 지친데다 말라리아까지 걸려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메이카로 향했다. 거기서 1년을 빈둥거리며 지내다 150411월 스페인에 도착했다. 그 사이에 콜럼버스 후원자였던 이사벨은 죽었고, 페르난도는 콜럼버스에게 은퇴를 종용했다

그는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다가 1506520일 사망했다. 사후 콜럼버스의 유해는 산토도밍고로 옮겨졌는데, 다시 쿠바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설도 있어 과학자들은 콜럼버스 유골에 대한 DNA 검사를 허가 받으려고 노력중이다.
 

#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 ‘해방신학의 선조

 
콜럼버스의 일행 가운데 그들이 낳은 재앙의 기록을 남긴 이가 있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1470~1566). 그는 스페인의 살라망까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1502년 산토도밍고로 갔다. 쿠바 정복에 참여한 그는 경제적으로 성공했으며, 1510년 사제에 서품된 뒤에도 계속 부를 축적하며 다른 정복자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514년 식민지체제의 불평등과 불의에 눈을 뜬 그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일생동안 원주민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길로 나섰다. 스페인에 건너가 추기경과 국왕을 만나 착취당하고 있는 원주민 보호대책을 요구하였고 구체적인 방안으로 흑인노예의 수입과 수도원의 대농장 감독을 제안하기도 했다. 먼 훗날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그를 해방신학의 선조라고 부른다.
 

# 새로운 시대를 연 콜럼버스

 
콜럼버스는 네 번의 항해를 했음에도 현재의 미국 본토에는 닿지 못했다. 데이비스(Davis, 2004)하지만 그의 카리브해 도착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정복,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놀라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콜럼버스가 불굴의 용기, 끈기, 항해술로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교과서들은 그의 다른 면들을 보여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적당히 얼버무린다. 콜럼버스의 카리브해 도착은 놀라운 업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인류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사건들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황금을 찾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원주민들을 재빨리 노예화했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스페인의 모험가들, 그 이후엔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주도한 바야르로 학살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전쟁, 강제노역, 가혹한 형벌, 유럽에서 온 질병들로 황폐화되었다.”
 
[강준만, 미국사 산책 1, 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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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는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유럽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지도자들은 아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영역에 대한 권리를 놓고 서로 협상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협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유럽의 입장에서는 신대륙으로 진출하는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이지만, 아메리카 입장에서는 침략자들이 등장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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