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토요일

[한국전쟁]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6월 28일)한 뒤 왜 3일간 머물렀을까?

인민군은 1950628일 서울을 점령한 뒤 3일간 그대로 머물렀다. 이는 훗날 한국전쟁 연구자들에게 수수께끼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설이 난무하고 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 후 3일간의 수수께끼

 
서울 점령으로 모든 게 끝나리라고 본 3일간의 제한전이었다?
남로당 당원들의 봉기를 기다렸다?
후방에서 대포와 기타 보급품들을 수송할 필요 때문이었다?
소련 및 중국과 다음 행동 방향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공병과 통신 소홀에 따른 피치 못할 전략상의 공백에 따른 3일간의 휴식이었다?
춘천 전투 때문이었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개입설

 
러시아 국방부의 군사연구소 연구원 이고르 파포프는 입증 문서는 없다는 걸 전제하면서도 스탈린은 미국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면 원자 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고 우려해서 김일성의 부산 돌진을 저지시켰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런가 하면 모택동이 전쟁은 보급로와 퇴로를 준비해야 한다며 급한 추격전을 여러 번 경고했기 때문이라는 설, 미군 개입과 이에 따른 중국군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차 목표는 서울 점령이었다는 설

 
또 이런 주장도 있다.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 제1군단은 대규모 도하작전을 수행할 도하장비조차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목표가 통일정부 수립이었던 만큼 이들은 서울 진주 후 국회소집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서울에 체류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신속한 남하로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북한군은 결국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추격전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천 전투 때문이었다는 설

 
춘천 전투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춘천지구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7연대는 622일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하며 동시에 전 장병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 때문에 북한군 24천 명은 625일 새벽 춘천을 기습공격했지만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국군 6사단은 3일간 적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확보했으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인민군은 27일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춘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 하루 만에 춘천을 점령한 후 한강 이남의 수원과 이천 지역을 차단하여 국군을 포위하고 국군의 한강방어선 구축을 저지하려던 인민군의 초기 작전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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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도 한양을 점령했을 때, 선조는 이미 도망친 후였다. 왕(선조)만 잡으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왜군은 일단 멘붕에 빠졌다. 그런 점에서 선조의 도망은 최고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같은 논리로 북한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이승만 대통령이 재빨리 대전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당황한(?) 인민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물렀다는 설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런점에서 조선시대의 선조와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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