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과 정부 수뇌부는 서울을 떠나 피난해 놓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폭파를 한 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국군의 한 장성(이응덕)은 한강 다리 폭파가 인민군의 짓인 줄 알고서 “과연 적이지만 전술을 아는 놈들이구먼”이라고 감탄했을까.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제’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 혼자서 폭파 결정을 내렸을까? 그러나 최창식 혼자서 그 책임을 뒤집어썼다. 바로 이런 무책임과 기만에서부터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고 있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권』, 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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