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내 15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한 범야권 통합의 첫 번째 움직임은 1954년에서 1955년에 이르는 시기에 민국당 중심의 ‘호헌동지회’가 결성되고, 1955년 초에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조봉암 세력의 참여 문제
신당 창당에 있어서 가장 큰 쟁점은 조봉암 세력의 참여 문제였다. 신당 추진 세력은 조봉암의 참여를 지지하는 서상일, 장택상, 신도성 등의 민주대동파와 그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의 자유민주파로 갈렸다.
민국당의 대주주였던 김성수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종용하였다. 보수파들이 김성수의 권유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노선을 지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자,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명확히 태도를 밝힐 것을 권고했다.
# 김성수의 유언, “조봉암을 영입하라”
그런데 그만 2월 18일 김성수가 65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써 야권의 대동단결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김성수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비서실장인 신도성에게 조봉암을 영입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성수는 죽었지만, 조봉암은 김성수의 권고에 따라 2월 22일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는 자신이 8ㆍ15 후 공산당과 절연하고 대한민국에 모든 심력을 바쳐왔으며, 대공산 투쟁에 여생을 바칠 것이지만, “공산당의 독재는 물론이고, 관권을 바탕으로 한 독점자본주의적 부패분자의 독재도 어디까지나 반대한다”고 자신의 기본 노선을 재천명하였다.
# 조봉암을 반대하는 사람들
조봉암은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신당운동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보수파들은 계속 색깔 공세를 취했다. 신도성을 비롯하여 김성수의 유언을 들은 사람들이 보수파 간부들의 모임에서 김성수의 뜻에 따르자고 역설하였지만 조병옥과 장면 등이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들의 반대 논리는 과거 공산당 간부를 지낸 사람은 그 습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3월 7일 과거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던 김준연조차도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 그는 적어도 세칭 제3세력 내지는 중간파라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4촌간이라기보다는 동질적인 것이니 신뢰하고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병옥의 훗날 회고에 따르면, “나는 조봉암 씨의 정치이념 문제 때문에 그의 신당 가입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요...... 정치적 방편으로서 정치의 개종(改宗)을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당 가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이다.”
조봉암의 신당 배제가 결정되면서 신도성, 장택상 등이 호헌동지회에서 탈퇴하였다. 5월 중순 신도성은 탈퇴하면서 호헌동지회가 “미국의 힘에 의지하여 이승만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려고 한다”는 점과 “조봉암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대동단결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구파와 신파로 구성된 민주당의 탄생
민국당 계열의 보수파(자유민주파)는 7월 17일 자파만의 신당발기 준비위원회를 구성, 다른 보수 세력을 끌어들여 9월 19일에 신당을 창당하였는데, 그게 바로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반공이데올로기와 자유자본주의 신념’을 내세웠다. 민주당은 5명의 최고위원을 선출하였다. 대표최고위원에는 신익희, 나머지 4명은 최고위원은 대의원 투표로 조병옥(282표), 장면(278표), 곽상훈(262표), 백남훈(111표) 등이 뽑혔다.
민주당은 이른바 ‘구파’와 ‘신파’로 구성되었다.
한민당-민국당 계열을 승계한 구파는 신익희ㆍ조병옥ㆍ김준연ㆍ윤보선ㆍ유진산 등으로 지주 집안 배경을 가졌거나 해외 유학파가 중심이었다. 김성수의 ‘보성ㆍ동아 인맥’이 강세를 보였다. 이승만으로부터 소외된 전 자유당 인사들ㆍ흥사단ㆍ조선민주당계 인사들의 연합 세력인 신파는 장면ㆍ오위영ㆍ조재천ㆍ엄상섭 등을 핵심 인물로 한 관료ㆍ법조인 출신이 주류였다. 그 외에는 언론인과 정치인, 그리고 국내에서 교육을 받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제치하에서는 법관 또는 관료로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 신파와 구파의 갈등
신익희는 굳이 따지자면 구파에 속했지만 한민당 출신은 아니었고 신구파 사이에서 중산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기 때문에 신파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나중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놓고 신구파 싸움이 벌어졌을 때, 신구파 사이에는 이런 논쟁이 오고갔다.
신파 한동석은 “장 박사는 미국통이고 해공은 중국계가 아니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지원이 필요한데 이것을 관철하자면 장 박사가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주장한 반면, 구파 유진산은 “해공은 항일의 기록이 있고 대중의 지지도 높아요. 정치적으로도 장 박사에 비해 선배고, 우리는 한국인이니 한국적인 도덕관에서 이 중대 문제를 다루어가야 한다고 믿소”라고 주장했다.
그래도 이건 신구파가 상호 점잖은 경쟁관계를 유지했을 때의 이야기이고, 50년대 후반에 가서 신구파는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내며 싸우게 된다.
# 조봉암의 진보당, 그리고 장택상과 이범석
민주당 참여를 거부당한 혁신계 야당 세력은 1955년 9월 1일 경기도 광릉에서 집회를 열고 새로운 혁신 세력의 창당을 결의하였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2월 22일 조봉암, 서상일, 이동화 등을 주축으로 해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공포로부터의 해방”, “나가자 진보당, 뭉치자 피해대중”이라는 슬로건 아래 당명을 진보당이라 정하고 ‘진보당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탈퇴한 정치인들 중에는 진보당과는 색깔이 맞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장택상은 민주당이 민국당의 아류일 것이라 판단하고 조병옥과 자신의 비서인 김영삼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당 참여를 거부하였다. 장택상은 이범석 등과 함께 가칭 민정당 발기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56년 3월 30일 공화당을 창당했지만, 공화당은 장택상과 이범석의 주도권 다툼으로 창당 12일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권』, 297-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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