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5월 21일, 이승만은 사찰을 보존하자는 제하의 유시(관청에서 백성에게 타일러 가르침 또는 그 문서)를 내렸다. 얼른 보면 아주 좋은 이야기 같지만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처승의 우세
1954년 5월 당시 1천여 개의 사찰 중 900여 개소를 대처승(帶妻僧, 살림을 차리고 처와 가족을 거느린 중)이 점유하고 있었다. 살림을 차리지 않는 비구승을 500여 명이었던 반면 대처승은 7천여 명이었다. 또 대처승 출신 국회의원으로 이종욱ㆍ최갑환ㆍ김법린ㆍ최범술 등이 있었고, 교단의 재산인 각 도의 여객회사와 목포의 대광유지, 부평의 베어링공장, 대전ㆍ대구 시내의 백화점과 극장, 전북의 도정공장, 기타 기업체 등을 모두 대처승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비구승에게 유리한 이승만의 유시
모든 면에서 대처승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걸 뒤엎겠다는 것이었다. 명분은 단 하나, 대처승은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이라는 것이었다. 유시 내용은 이랬다.
“일인(日人)들의 승(僧)이라는 것은 가정을 얻어 속인들과 같이 살며 불도를 행해 온 것이다. 이 불교도 당초에 우리나라에서 배워다가 형식은 우리를 모방하고 생활제도는 우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행하여 오던 것인데, 이것을 한인들에게 시행하게 만들어서 한국의 고상한 불도를 다 말살시켜 놓으려 한 것이다. 따라서 대처승들은 모두 사찰에서 나가 살 것이며 우리의 불도를 숭상하는 비구승들에 대해서는 사찰에 속한 토지를 경작케 하여 생계를 보유케 하고 사찰을 지켜 갈 수 있게 하라. 만일 그 수가 모자라면 속인이나 신도가 절을 지켜도 좋다.”
이승만이 유시를 내린 이유?
왜 이승만은 갑자기 그런 유시를 내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흔히 이런 설이 떠돈다.
“이승만은 1954년 5월 어느 날 서울 근교 관악산의 연주암에 올랐다가 절에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논산의 관촉사에 갔을 때는 법당에 아직도 ‘황국신민서사’가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고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계에 끼친 일제의 악영향이 광복 후 10년이 돼가도록 전혀 치유가 되지 않고 방치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동국대학교 석립동문회의 『한국불교현대사』는 새로운 설을 제시한다.
권력이 종교에 개입한 최초의 사건
“최근에 와서 가장 신빙성 있는 설로 대두하고 있는 것은 미국과 이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모종의 합의를 이룬 데서 야기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이 대통령은 집권 12년 동안 국정운영을 기독교 지향적인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 기독교의 교세를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끌어 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이 대통령의 불교정화와 관련된 유시는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사실상 유명무실케 하였고, 정교분리 원칙의 민주국가에서 정부 권력이 종교에 직접 개입한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처음부터 정화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던 성철 스님이 제2차 전국비구승대회에 불참하면서, ‘외부의 힘을 업고 하는 정화운동은 원만한 결실을 거둘 수 없다’며 이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 이후 파계사 성전암에 칩거, 8년 동안 장자불와하며 나오지 않았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구승의 행동
이승만의 유시는 비구승들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힘을 주었다. 비구승들은 몇 차례의 회합을 거쳐 1954년 8월 24일에 개최한 제1차 전국 비구승 대표자회의에서 대처승은 승려가 아님을 공포하는 동시에 대처승측 대한불교조계종 종권 인도를 정식 요구했다. 또 효봉ㆍ청담ㆍ금오ㆍ원허ㆍ적음 스님 등이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의 불교 정화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들은 10월 10일과 11일에도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을 만났다.
대처승의 대처, “비구승은 빨갱이!”
『한국불교현대사』에 따르면,
“11월 5일 대처승측은 ‘비구승은 빨갱이 집단이니 해산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선학원에 모여 있던 전국 비구승 대표 80여 명은 한국 불교의 총본산인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태고사를 강점(대처승측 주장)했다. 일단 태고사를 점거한 비구승측은 태고사 간판을 떼어내고 조계사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부터 태고사를 두고 비구승측과 대처승측 간의 일진일퇴하는 ‘사찰 점유 쟁탈전’이 시작됐다.”
대처승의 주장을 무시한 이승만
1954년 11월 6일 이승만은 “왜색승을 일소하라”는 요지의 제2차 유시를 발표했다. ‘빨갱이 사냥’에 관한 한 그간 왜색을 끌어안는 데에 앞장섰던 이승만이 “비구승은 빨갱이 집단이니 해산하라”는 대처승측의 성명을 무시했다는 게 흥미롭다. 제2차 유시 이후 수 차례에 걸쳐 ‘조계사’와 ‘태고사’ 간판 교체 소동이 일어났다.
1954년 11월 18일 이승만은 ‘불교정화위원회’ 구성을 촉구하는 제3차 유시를 내렸다. 비구승측은 12월 1일부터 3일까지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을 만났고, 12월 13일에는 서울 거리에서 시위하는 한편 또다시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을 만났다.
비구승 편을 노골적을 든 이승만
1954년 12월 18일 이승만은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내용의 제4차 유시를 발표했다. 이후 수개월간 단식농성과 유혈사태를 수반하는 양측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1955년 6월 10일 대처승측 300여 명이 태고사에서 묵언 단식투쟁을 하는 비구승측 200여 명을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지효 스님은 이에 대항하여 순교적 할복을 시도해 창자를 드러냈다.
1955년 6월 15일 이승만은 제5차 유시를 내렸다.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8월 5일 제6차 유시를 내렸다. 이번에도 “친일승은 물러가라”는 내용이었다. 9월 10일 대처승인 경주 분황사 주지가 할복 자살하였다. 단식ㆍ데모ㆍ법원난입ㆍ유혈난투극ㆍ할복자살 등으로 점철된 양측의 처절한 갈등과 투쟁은 50년대를 넘어 60년대까지 계속 이어진다.
비구승의 우세
그러나 이승만이 여섯 차례에 걸쳐 내린 유시의 효과는 이미 1955년에 양측의 세력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정부의 종교 간섭은 위헌이라는 국회의 결의와 대처승측의 법적 정당성을 인정하는 법원의 결정도 있었지만, 국회나 법원보다는 역시 이승만의 힘이 더 셌다.
대처승이 점유한 사찰은 900여 개소에서 1955년 10월경에는 450여 개로 감소하였다. 대처승이 분규 과정에서 집단으로 이혼 소송을 냄에 따라 비구승의 수는 500여 명에서 1955년에는 1천 명을 넘어섰으며, 1959년에는 2천 700명에 이르렀다.
불교계의 정치적 예속성을 심화시키는 결과 초래
그러나 국가권력의 개입은 불교계의 정치적 예속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불교 신자들은 경무대 앞에서 북진통일 지지시위를 벌이고, 1956년에는 비구승측 대표들이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선거 재출마를 호소하였으며, 1956년 5ㆍ15 선거를 앞두고 대한불교조계종은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이청담의 명의로 4월 24일자 『서울신문』에 5단통 〈리승만 박사 대통령, 리기붕 선생 부통령 당선 기도 호소문〉을 싣기도 했다. 3ㆍ15 부정선거에도 조계종단이 체계적으로 동원돼, 4ㆍ19 이후 이청담은 자유당에 정치자금을 헌납한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승만의 정치적 노림수?
바로 그런 정치적 효과를 노려 이승만은 ‘유시 정치’를 통해 불교에 개입했던 걸까? 강인철은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이 대처측으로부터 비구측으로 지지 세력을 갑자기 전환한 것은 대처측 정치인사 다수가 한민당과 함께 반이승만 진영으로 합류했던 점, 그리고 이승만이 3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는 한편 사사오입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점 때문이었던 점 때문이었던 듯하다. 특히 전자의 측면과 관련하여, 이승만의 대처승 축출 기도는 태고종 총무원장으로 당시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박성하가 자유당 정권을 앞장서 비판하고 있었고, 195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대처승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점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김동화의 주장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대처승이 꺼낸 ‘빨갱이 카드’는 일종의 코미디
대처승측이 “비구승은 빨갱이 집단이니 해산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건 코미디 같은 일이었겠지만, 그건 아마도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기댈 건 그 카드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념적 성향으로 보자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강인철은 정치적 성향으론 해방 당시 청년 대처승을 주축으로 한 재야 혁신 세력은 대다수가 좌경적 정치 성향을 보였던 반면 친일적인 대처 종권 세력과 대부분의 비구승들은 우경적 정치 성향을 보였다고 말한다.
대종교와 유교도 비슷한 운명
이 모든 건 이승만의 ‘우상 정치’와 ‘동원 정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국가권력의 개입은 불교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대종교와 유교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대종교는 임시정부계의 종교로 지목되어 정부의 통제로 교세가 급격히 쇠퇴하였다.
이승만은 유교에도 깊이 개입하여, 1954년 10월 삼강오륜을 지켜 유교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담화를 발표한 바 있다. 1956년부터는 자유당을 앞세워 김창숙 중심의 유교 교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는데, 이런 개입은 김창숙이 강경한 반(反)이승만 노선을 걸으면서 이승만에 대해 독설에 가까운 비판을 퍼부은 인물이었다는 점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반(反)이승만 노선의 김창숙을 제거하라!
김창숙은 노령(1879년생)으로 1956년 2월 성균관대 총장직은 스스로 사임했지만 여전히 성균관장ㆍ유도회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1956년 5ㆍ15 대선은 부정선거이므로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외치는 한편 ‘민의 조작의 주동집단’인 자유당을 해산하라는 등 강경 비판에 앞장섰다. 이승만 정권은 1957년 7월 깡패들을 동원해 김창숙을 몰아내고 친(親)이승만 인사들로 성균관과 유도회를 장악케 했다. 이후 반(反)김창숙파는 유도회 총재로 개신교 신자인 이승만을 추대하기도 했으며, “3ㆍ15 부정선거 당시 이들은 이승만의 당선을 위해 유도회의 이름으로 자유당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다.”
이승만 정권에 도움이 되는 종교를 만들어라!
이처럼 이승만과 이승만 정권이 행사한 종교 개입의 판단 잣대는 이승만 정권에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불교의 경우 이승만이 8차에 걸친 유시 발표를 통해 공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반공 북진통일의 화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영도자ㆍ국부로서 자신의 절대권력을 확인하고자”하는 심리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권』, 288-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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