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반둥회의(1955년 4월 18~24일) : 평화공존ㆍ비동맹ㆍ반식민주의ㆍ민족자결주의

1955418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선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개최되었다. 인도네시아, 미얀마,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인도, 파키스탄이 중심이 되어 열린 반둥회의에는 23개 아시아 국가와 6개 아프리카 국가가 참가하였다. 이들 국가들은 세계 인구의 55%를 점하고 있었지만, 세계 소득의 겨우 8%를 차지하고 있었다.
 

#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 긴밀한 유대관계 형성 목적

 
반둥회의는 식민지주의의 종식을 가속화하고 미소간의 냉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비동맹을 추구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할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었다.
 
418일의 개막 연설을 통해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나의 가슴은 감격으로 벅차오르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분리시켜 놓고 있는 외양적인 차이보다 훨씬 중요한 동질적인 특성에 의해 단결하였다. 우리는 식민지주의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공통된 혐오감으로 단합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평화의 10원칙

 
이미 19546월 제네바 회의 휴회 기간에 중국 수상 주은래와 인도 수상 네루는 회동하여 평화 5원칙에 합의한 바 있었다. 반둥회의는 평화 5원칙과 비슷한 평화공존ㆍ비동맹ㆍ반식민주의ㆍ민족자결주의를 중심으로 한 평화의 10원칙을 채택하였다.
 

# 반둥회의 개최의 직접적 영향 : 한국전쟁

 
이대근은 한국전쟁이 반둥회의를 개최하게 된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약소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은 했다고 하지만 언제 선진국, 제국주의 열강들의 전쟁 놀이터로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들을 누구나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그것을 몸소 한국전쟁에 와서 자기 눈으로 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인도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걷고 있던 유고, 그리고 아프리카권에서의 종주국 역할을 한 이집트, 이런 나라의 지도자들이(네루, 주은래, 티토, 나세르 등) 모여서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자기들을 위해서도 한국전쟁을 하루빨리 종결시켜야 한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진행시키게 된다. 그 후 그들은 소련과 미국 어느 쪽에도 붙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19554월에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10개항의 비동맹자주화 선언을 한다.”
 

# 미국과 소련의 반둥회의에 대한 시각

 
미국은 이 반둥회의를 매우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미국 언론은 대부분 냉전논리와 반공이라는 액센트로 반둥회의의 정신을 왜곡 보도하였다. 이 회의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 뉴욕타임스도 반둥회의를 비판하기에 바빴다.
 
소련은 반둥회의의 성공을 기원하는 축전을 보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반둥회의를 통해 중국 더 나아가서는 소련의 세력의 확대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처음부터 이 회의의 개최를 반대하였다.
 
반둥회의가 규탄하는 식민지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는 주로 서방세계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반둥회의를 미국은 못마땅하게 보고 소련은 흐뭇하게 보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은 미소간 군사경쟁이 강화되면서 전쟁의 위협이 높아지고 있는 것에 대한 제3세계의 자구책이었다.
 
미소간 군사력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은 반둥회의가 추구하는 비동맹운동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5669일의 연설에서 미 국무장관 포스터 덜레스는 비동맹또는 중립의 정신을 비도덕적이고 근시안적인 생각이라고 규정짓고, 이는 남들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하였다.
 
1955년경 제3세계의 화두는 평화공존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걸 친공’(親共)으로 간주하고 배격하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공존주의사상은 반정부 분자들의 파괴모략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니 이런 분자들을 먼저 제지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이승만 정권의 반둥회의 비난

 
이승만 정권은 미국보다 더 강경한 자세로 반둥회의를 비난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특히 그 회의의 주동자인 인도를 비난하면서 아시아ㆍ아프리카회의를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하고 참석하는 회담으로 단정지었다.
 
공보처장 갈홍기는 425일 반둥회의가 공산 진영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회의라는 이유에서 한국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면서 이 회의에 참석한 일본은 미국을 배반하고 있으며 새로운 아시아 제국을 몽상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갈홍기는 426일에도 일본이 친공 정책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일본 수상이 일본은 진정한 반공 국가이며 공산 진영 국가들과 통상을 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에는 정치적 의미가 없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공산 국가들과 통상을 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정복에 협조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신경질적인 반응과는 달리, 반둥회의에서 제기된 반식민주의비동맹주의는 당시 국내의 지식인과 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그런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 비동맹주의와 나세리즘

 
19567월 네루, 나세르, 티토 등 제3세계의 3거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만나 비동맹주의를 재천명하였다. 바로 그 7월에 나세르는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고 영국과 프랑스군의 침공을 물리침으로써 제3세계 민족주의의 영웅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 비동맹주의, 사회주의 노선은 나세리즘이라 불리게 되었다. 195611월 한국의 진보당 발당대회는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지지하는 이집트에 대한 영불 침략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 소련의 호의적 태도

 
소련은 초강경 자세로 나세르를 지지함으로써 수에즈운하 사건은 소련에게 큰 외교적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이후 전 아랍권은 소련에게 급격히 호의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이 한국에선 이승만 정권이 비동맹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빌미가 되었다. 나세르는 1952년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를 주도해 정권을 잡았는데, 훗날 한국에서 516쿠데타에 대한 초기의 호의적 반응은 나세르의 활약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것에 힘입은 바 컸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 24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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