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1일 토요일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 [1] 해방이전

윤치영(尹致暎, 1898210~ 199629)
 

대한민국의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내무부 장관, 주프랑스 공사를 역임했다. 본관은 해평 윤씨, 호는 동산(東山).
 
한 살 연상의 조카 윤보선은 그의 둘째 형 윤치소의 장남이었다. 인촌 김성수의 아들 김상석(金相晳)이 그의 사위이다.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는 그의 본처의 처남인 동시에 사돈이기도 했다.
 
1898
 
  • 1898210일 경성부 안국동에서 무관 출신 윤영렬한진숙62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집은 굉장한 부자여서 집의 크기가 2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윤영렬의 자식들은 형 윤치오, 윤치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등과 누이 윤활란, 윤노덕, 이름미상 3명의 누이가 있으며 첩의 자식까지 합쳐서 총 93녀를 두었다.
  • 윤치영의 9대조 윤두수윤근수는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다. 윤치영이 윤치소의 이복형제라는 설이 있다.
  • 유년기에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으로 내려갔다. 아산에서 조카 윤보선과 함께 한문 서당을 다녔고, 정식으로 한학자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 이후 안성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안성에 있다가 다시 경성부로 올라와 교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졸업하였다.
  • 여기에서 그는 30년 연상의 맏형 윤치오와 윤치소, 사촌 윤치호의 집에 드나들던 노백린, 박영효, 유길준, 양기탁, 이승훈, 이승만, 김광서 등의 청년지사들을 보게 된다. 그는 다른 형제나 조카들과 달리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고 한다.
 
1913
 
  • 그 뒤 그는 19133월 무시험 추천 입학으로 관립 한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 첫날부터 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던 그는 가족 아무와도 의논 없이 중앙중학교로 전학을 결심한다.
  • 1913년 봄 중앙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함부로 전학한 것에 대해 형 윤치오, 윤치소 등에게 책망을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중앙중학교에서는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국어 담당 교사로 만났다.
  • 중앙학교에 다니면서 윤치영은 YMCA학당 중학부 과정(야간)을 함께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이때 변영로, 안재홍, 안재학(안재홍의 동생) 등과 알게 되었다. YMCA 청년회 학당 시절 그에게 영어, 철학과목을 가르친 이승만. 1920년 미국에서 재회한 이후 그는 40년간 이승만의 가신이며 정치적 최측근으로 그를 보좌하였다. YMCA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이상재, 김규식, 이승만 등에게서 수학한다.
 
1915
 
  • 1915YMCA학당 중학부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16
 
  • 1916년 봄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일찍부터 영어(英語)를 배운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유년시절에 배운 영어 실력은 훗날 미국 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윤치영은 중앙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다.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 한자,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 YMCA 강당에서 그는 강사로 있던 이상재, 이승만 등을 만났고 동문으로는 여운홍, 허정 등을 만났으며 중앙학교 동창인 여운홍의 형 여운형과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후일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 스포츠를 좋아하던 그는 중앙학교 재학 당시 그는 야구부와 축구부에 가입하였으며 졸업 직후 잠시 모교인 중앙학교의 야구부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중앙학교에서의 은사로는 국어와 역사 교과목을 가르치던 주시경, YMCA중학부에서는 월남 이상재 등의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한다.
  • 1916년 조카인 윤보선이 민영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그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집안의 주선으로 수군절도사 이봉구의 딸이며 역사학자 이병도의 누이인 이병영 결혼하게 된다. 이병도는 그의 둘째 누나의 남편 이병림의 일족이었다.
  • 그는 결혼식 첫 날에 신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한다. 일생을 해로할 반려자가 될 아내를 택하는데 당사자끼리는 단 한 번의 상면도 없이 집안에서 정해주는 대로 결혼식날 비로소 얼굴을 맞대게 되어 있었으니 참으로 고루한 일이 아닐수 없다.”고 평하였다.
 
1917
 
  • 사립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야구부 코치를 맡던 그는 1917년 도일, 일본 와세다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18
 
  • 19182, 와세다 대학의 예비 과정을 마치고 그 해 3,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또한 재동경 한인 YMCA 청년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 그는 윤치호의 친구이자 동경 YMCA 총무로 있던 미국인 잭 데이비스의 소개로 그의 비서인 라이언 부인에게 영어 회화 개인지도를 받는 도중 포틴 포인트’(fourteen point), ‘셀프 디터미네이션’(self-determination)과 같은 생소한 단어부터 시작해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라든지 우리나라의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의 파리행 예정 기사 등을 듣게 되었다. 그는 사발통문을 통해 동경에 주재하던 다른 한인 유학생들에게 해당 소식을 전파하였다.
  • 19181123,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에 일본을 방문한 중앙학교 동창인 여운홍의 일본 입국을 환영하는 유학생 환영회를 개최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론을 강연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그를 만나 미국 교포들의 독립자금 모금과 움직임, 국제 정세에 대해 상세한 소식을 듣게 된다.
 
1919
 
  • 191928,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조선 28독립 선언에 참여하였으며, 먼저 훈방조치된 윤치영은 법적 면회가 허가되는 날마다 매일같이 찾아와 투옥된 동지들에게 음식물과 옷가지를 넣어주며 바깥에서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힌 그는 그의 셋째 형 윤치성(尹致晟)일본 육사 출신으로 노일전쟁 때 일본군 기병대 장교로 참전해 용맹을 떨친(윤치영의 20세기, 72)” 덕분에 불령선인 C등급으로 분류되어 구속은 모면하고 훈계 방면되었다. 그는 유학기간 중 방학이나 휴가 때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고 여행을 하며 즐겁게 지낸 일을 소중한 추억으로 그의 자서전에 회고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 중 일본 YMCA 청년회에 나갔으며 YMCA 청년회 야구부와 축구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밖에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야구나 축구 모임이 없으면 등산을 하였다.
  • 19194월 경, 재동경 YMCA 등을 방문하고 도쿄 시내의 번화가와 서양인 거주지 등을 방문하였다. 이때 재동경 중국 YMCA에 방문했다가 이승만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조카 윤보선을 만났다. 윤보선의 동경 잠입을 계기로 그는 이른바 2월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게 되었다.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로서 윤치영 등이 주동이 되어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유억겸(兪億兼), 백관수(白寬洙), 박승철(朴勝喆), 최원순(崔元淳) 등이었다.
 
1921
 
  • 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던 중 그는 이승만의 권고로 미국 유학을 결심,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19217월에 조직된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여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그는 민찬호ㆍ김영기 등과 대한인동지회 중앙부 이사원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옹호와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21년 태평양잡지(뒤에 태평양주보로 개칭)의 주필로서 민족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동시에 동아일보의 연락으로 동아일보와 제휴, 동아일보 북미합중국 특파통신원을 겸하였다.
 
1922
 
  • 1922년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 사회주의 사상에는 절대 빠져들지 말라는 사촌형 윤치호의 경고와, 부유층에 대한 비판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점 때문에 사회주의 청년 단체와는 멀리하였으며, 윤치영은 그들로부터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조롱을 당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신익희, 장덕수, 안재홍, 장택상, 조봉암 등을 만나서 어울렸다.
  • 1922년 봄 인천 제물포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상하이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사촌 형 윤치호와 스승 이승만 등의 만류로 고국에 체류하게 된다.
  • 1922년 귀국하여 윤치호ㆍ이상재 등이 지도하던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관에 들어가 일하였다. 또한 모교 중앙중학교의 야구부 코치이자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YMCA)의 야구부 감독, 축구부 감독을 겸하였다.
 
1923
 
  • 1923년부터 그는 미국 하와이 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 1923년에는 귀국하여 중앙고보의 야구팀 코치가 되었다. 192375, 하와이 이주노동자 2세 학생들이 야구팀을 결성했다. 이때 YMCA에서는 하와이로 원정경기를 가는 야구단을 조직했다. 중앙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축구, 야구, 육상 선수로 활동했고 중앙고보의 야구 코치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야구단의 한사람으로 차출, 1루수로 선발되어 태평양에 건너갈 수 있게 됐다. 조선총독부 외무국에서는 윤치영이 반일분자라 하여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당시 충청남도지사 김관현(金寬鉉)의 주선으로 출국이 허용, 총독부 외무국에서 여권을 발급받고 출국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난 것이 알려지면서 김관현은 징계를 받게 되고, 조선총독부는 하와이섬에 밀정을 파견한다.
 
1924
 
  • 6월 초 윤치영은 중앙YMCA야구단을 이끌고 출국, 미국 하와이에 도착했다(윤치호가 그에게 하와이로 가서 시합도 하고 이승만을 만나보라고 했다). 윤치영이 이끈 팀은 하와이 한국인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하와이의 일본인 팀과 경기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40 패배였다.
  • 윤치영의 하와이행에는 야구보다 중요한 비밀 임무가 있었다. 이는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김성수(金性洙) 등이 보내는 약 5만 달러의 자금을 이승만에게 전하는 사명이었다. 하와이 도착 직후 워싱턴 D.C.에서 달려온 이승만에게 그는 안부편지를 전하며 숨겨온 약 5만 달러를 전달했다
  • 국내에서 그는 아들 윤기성이 병으로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첫 부인인 이병영의 사망 소식까지 접한다. 이승만과 안창호 등이 수시로 찾아와 실의에 빠진 그에게 독립과 이상을 말하였고, 그는 이내 실의를 잊고 독립운동과 학업에 전념하게 된다.
  • 19247월부터 1937년까지 대한인동지회 총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미국 본토행을 단념한 그는 이승만의 요청대로 하와이에 눌러앉아 이승만이 교포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태평양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이 잡지는 이승만이 발행하던 것으로서 한국사(韓國史)와 한국 문화를 영어영문으로 소개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 운전을 할 줄 몰랐던 미국생활 초기에는 이승만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함께 배달하러 다녔다. 후일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은 15센트짜리 빵 한 개, 4~5센트 하는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에도 빵 한 개와 야채 스프가 고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그 시절 대부분의 한국인 교민들은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고, 윤치영과 이승만도 때로는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은 대화와 언변에도 능했지만 잡다한 재주도 있었는데, ‘이 박사는 농사일 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힌 솜씨인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도 대단해서 샌님인줄 알았던 한국 교포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회상하였다. 뒤에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몇인의 배달부를 채용하여 배달, 배송을 시켰지만 기타 제반사항은 윤치영 자신이 직접 주관하였다.
  • 이후 집에서 충분한 학비를 보내왔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게 정치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윤치영은 학업에 많은 지장을 받기는 했으나 나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독립운동에 몰두했다고 회상하였다.
  • 1924년초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 본부이사 겸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
  • 19241111, 임정으로부터 해군군비 축소와 태평양 및 극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제2차 태평양 회의에 파견, 한국인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을 수행하여 일본의 침략적 야만성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연안 국가 17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서재필을 대표단장으로, 신흥우, 유억겸, 이승만, 양유찬과 윤치영을 대표단원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전보로 보내왔다.
  • 당시 일본은 30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윤치영은 일본측 대표단장 쓰루미 유스께(鶴見佑輔)를 그의 숙소로 찾아갔다. 쓰루미 유스케에게 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침략상과 총독부 정치의 잔혹성 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만약 그가 불손한 태도로 나온다면 주먹다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한다. 그런데 쓰루미는 윤치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면서 신중한 태도로 듣고 있더니 반박하였다.
    “일본인들은 비록 하찮은 인력꾼(잡역부)이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데,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잘사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애국심이 없어서 협박에 약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대학 출신들이고 당신부터도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 아니냐? 그래도 조선인 가운데 애국애족하는 사람들은 상당수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니 이 점을 너희는 일본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쓰루미 유스께의 역설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윤치영은 민망해서 물러났다. 후일 회고하기를 내가 그 사람의 노련한 말솜씨에 완전히 말려들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1925
 
  • 1925년 여건이 악화되면서 하와이 대학교를 중퇴한다. 그해 여름 이승만으로부터 본토로 건너가 공부하는 것이 후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권고를 듣고 이듬해, 이승만으로부터 약간의 여비를 받고 호놀룰루 항구에서 배를 타고 본토로 건너간다. 바로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한다.
  • 미국 본토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동시에 각지에 동지회 지부를 설치하고, 순회 강연을 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아메리칸 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7
 
  • 프린스턴 대학교를 2년 다니다가 1927년 컬럼비아 대학교로 옮겼다.
 
1928
 
  •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법학과 3학년 수료 후 중퇴한다.
  • 이승만과 헤어지기 전 그는 이승만에게서 기념으로 대형 태극기를 선물받았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태극기를 고이 간직하였다. 이 태극기는 구미위원부 파리 대표부(통합되기 전 임정 파리대표부)에 걸려 있었던 태극기였다.
  • 19286월에는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에 참여하여 사장인 허정을 중심으로 김도연ㆍ김양수 등과 편집을 맡아 일하였다.
  • 1928년에는 엘리자베스시티 주립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다가 다음해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옮겨서 수강하였다.
 
1929
 
  •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였다.
  • 그의 활동 소식을 접한 안창호(安昌浩)는 사람을 보내다가, 직접 윤치영이 거주하는 하숙집을 찾아와서 그와 세상과 정치 담론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안창호는 그에게 자신의 국민회와 흥사단에 들어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치영은 자신은 이승만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안창호가 거듭 부탁했으나 그는 거절하였고, 안창호 역시 설득을 포기하였다.
  • 1920년대 후반 뉴욕에 체류중이던 윤치영은 이승만과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 시기에 그가 보낸 간찰 중 장문의 간찰 2통이 발송되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간찰 답신을 받았다. 장문의 간찰 중 첫 번째 간찰에서 그는 이승만을 프랑스의 나폴레옹, 터키의 케말 파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에 비견시키면서 이승만에게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독재적 지도자가 되라고 권고하면서 윤치영 자신은 이승만을 위해 견마지로의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승만에게 필요한 금력, 정략 및 국내외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 동지회와 동지식산회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뉴욕지역 동지회 지회 조직에 앞장설 각오를 피력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도 그는 수시로 편지와 전화로 이승만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 두 번째 장문 간찰에서 윤치영은 뉴욕에 집결한 한국인 유학생들 58명을 중심으로 동지회 뉴욕지회를 발족시키는 데 성공하였음을 알리면서 앞으로 수준 높은 회원들을 더 많이 포섭하기 위해 국부’(國父 : the father of Korea) 이승만이 (독립 이후) 건국 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 윤치영으로부터 고무적인 간찰들을 접수한 이승만은 직접 친필로 네 차례의 답신을 통해 하와이의 동지촌과 동지식산회사의 실황을 알려주고 또 윤치영이 제기한 네 가지 의문점에 대해 대답을 하였다. 윤치영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이상촌 건설 주장에 고무되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 및 한인동포 청년들을 모으고, 청년 비서들을 채용하여 미국 및 한국 국내외, 일본 등의 정세와 언론의 동향을 파악,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체육활동, 청년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던 윤치영은 청년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고 이승만은 그를 각별히 신뢰하였다.
  • 1929이승만에 의해 임시정부 구미 외교위원부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그해 윤치영은 미국 엘리자베스시티 주립 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결석이 잦아 1학년 재학 중 중퇴하고 만다.
 
1930
 
  • 1930년 태평양잡지가 태평양주보로 개명하면서 윤치영은 태평양주보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이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하면서 구미위원부 위원의 직함과 동시에 태평양주보에 칼럼 기고 활동하였다. 또한 잡지 주간 신태평양을 발행하고, 주필 겸 사장으로 활동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고국에서 친지들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강연료, 재미동포들의 후원금으로 가난한 생활을 연명하였다.
 
1932
 
  •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국제법 학사 학위를 받았다.
  • 워싱턴 D.C의 카네기 평화재단 국제법연구소에서 5년 계약직 연구원이 되어, 국제법을 연구하였다.
 
1934
 
  •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국제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5
 
  • 511, 일시 귀국하다.
 
1936
 
  • 1936년초 미국으로 출국, 그 후 카네기 평화재단에서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YMCA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에 선출되었다.
 
1937
 
  • 19375월에 미국을 출발, 영구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경성부 서대문구 충정로33번지에 집을 마련하여 거주했다. 국내로 들어오자 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 겸 흥업구락부 간사, 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주말마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를 자주 위문하였다.
  • 193769일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후원회 이사에 선출됐다.
  • 윤치영은 자신의 귀국 목적이 재정난을 겪고 있던 이승만에 대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병준은 윤치영의 귀국이 이승만과의 사전 협의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윤치영은 이승만 관련 최신 정보를 흥업구락부에 제공했음이 분명했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흥업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후일 정병준은 그가 흥업구락부의 정식 회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출입하던 그는 미행을 당했고, 종로 연건정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불심검문을 이유로 체포되어 전신수색을 당한 뒤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8
 
  • 이후 종로구 안국동 집에 도착 생활하던 중, 1938년 말 집에 찾아온 서대문 경찰서 소속 형사들에게 다시 연행되었다. 이때 그의 가택에서 발견된 일본경찰의 눈에 띈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 역시 화근이 되었다. 체포된 그날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취조 과정에서 서대문 경찰서 2층에 끌려간 그는 이승만으로부터 어떤 밀명을 받고 귀국했는가 추궁당했다. 이어 미국에서의 행적을 설명하라는 요구와 함께 이승만과의 관계, 안창호와의 관계 등을 집중 추궁당했다.
  •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3개월간 감금당했다. 일본 경찰로부터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의 활동을 추궁당하다가, 일제는 그와 임시정부와의 비밀연락을 걸고 넘어졌다. 이후 일본 경찰로부터 연락망을 대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국내 비밀공작을 대라, 해외 독립단체들과의 연락관계를 불라는 구타와 협박을 당하였다.
  • 19385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93일 신흥우ㆍ갈홍기 등과 함께 이른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처분으로 석방된 이후 친일협력의 길을 걸었다.
 
1939
 
  • 19393월 초 중부경찰서로 이송되었다.
  • 옥중에서 그는 310일 안창호의 부음 소식을 접하였다. 그리고 곧 경기도 경찰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안재홍을 추켜세우고 여운형도 이미 자백을 하였는데 너만 혼자서 버틴다며 회유하였다. 그 뒤 그의 국내활동을 따지더니 교우관계를 추궁당하였다. 일경은 그에게 제시한 흥업구락부의 명단을 제시하며 관련성을 집중 추궁하기도 했다.
  • 그 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3, 4개월 수감되어 있었고, 유길준의 아들이자 순종의 동서인 유억겸도 끌려와 취조당하였다. 중부서와 경기도경찰청 등으로 끌려다니며 5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그는 또 흥업구락부 예하 3개 그룹에서 포섭하려던 포섭자 명단을 일본 경찰에 발설하였다. 마침 서대문 경찰서에 취재차 왔다가 윤치영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매일신문 기자 서정억은 그의 처참한 고문 장면을 목격하고 항의했다가, 취조형사들에게 구타당하였다. 서정억의 구타사건으로 현명건 등 서대문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경기도 경찰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의 고문현장을 목격한 동아일보사 서정억 기자에 대한 구타사건은 언론계와 기독교계로 번졌고, 외부로도 알려져 일본 본국의 언론인과 기독교 단체에서 총독부에 항의성명서와 항의방문을 하는 사태로 확산되었다.
  • 그 뒤 사촌형 윤치호가 사건 연루자 전원 52명의 신원을 책임진다는 신원보증서와 시말서를 작성했고 이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석방되었지만, 사촌형 윤치호가 조선총독부 특무기관으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공황상태에 빠져 그해 가을 내내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이후 1942년까지 4년간 대화숙 보호 관찰소에 출입하였다. 서대문에서 신촌 굴레방다리로 넘어가는 아현 마루턱에 있는 옛날 감리교 신학교(지금은 새마음 병원으로 변하였지만)를 당시 일제는 그들의 일본정신 고취를 위해 설립했다는 이른바 대화숙 보호관찰소’(大和塾 保護觀察所)를 여기서 운영하였다.
  • 193955일 서울 종로 YMCA회관에서 중앙기독교청년회와 조선일보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전국역도대회에 본부위원으로 참여했다.
  • 그는 대화숙 보호감찰기간동안 세뇌교육을 거절하며 버텨냈다. 이후 그는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품게 된다. 일본에 대한 반감과 감정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40
 
  • 19401, 그의 문중에서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토론하였다. 17일 윤치소,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형 윤치오의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치창, 치왕, 치오 등은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 형제들과 사촌들, 조카들 등이 참여한 문중 회의에서 그는 이승만 박사 등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달성될 것이다라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는 문중의 창씨개명 시도를 반대하고 저항하였지만, 문중 총회에서 창씨개명은 결정되었고 그도 본인 의사와 관계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다.
  • 윤치영은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며 창씨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결국 그는 이토 치에이로 창씨 개명한다.
  • 1940년대초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그는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승만, 윤치호 등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 대외활동을 줄였다. 이승만 등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였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라디오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
  • 1940년대 초반 윤치영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에 참여하였다.
 
1941
 
  •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국내에 있는 문사,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전쟁의 승전을 찬양하는 말과 글을 여기저기 내걸도록 강요하고 나섰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점점 미쳐간다며 분개하다가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朴熙道)가 그를 만나자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그 당시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양지광에서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저명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 윤치영은 자신의 허락 없이 명의를 도용했느냐며 항변하였다.
  • 박희도는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은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는 길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는 그의 이름 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신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의 승락 없이 게시한 모양이었다. 윤치영은 그들과 같이 박희도를 찾아가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윤치영은 동양지광에 실린 글은 박희도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며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었음을 해명하였다.
  • 그해 1220일 박희도(朴熙道)가 운영하는 순일본어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사에서 주최한 미영 타도 대좌담회에서 연설하였는데, 법률이나 외교를 연구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간섭 행위에 대한 일본의 신성불가침의 자주권, 환언하면 국가 생존권에 관한 최후적 발단이라고 일본의 행위를 옹호하였다.
  • 1941임전대책 협의회에 참가하였다. 임전대책 협의회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를 조직하여 97일 서울에서는 76명이 1원짜리 채권을 가두판매하였는데 윤치영은 여기에 동대문지구 대원으로 참가했다.
  • 칼럼을 기고한 것은 명의 도용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도용된 동양지광에 실린 글에 그는 창씨개명이 실리지 않고 본명인 윤치영으로 게재 되었다.
 
1942
 
  • 19423동양지광에 쓴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이란 글을 기고했다. 윤치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 자신의 명의로 된 기고문은 박희도가 본인 허락 없이 명의를 도용한 것이라 하였다.
  • 1942년 이후 그는 광산 채굴 사업에도 손을 댔다. 그가 귀국한 목적은 미국에서 재정적인 곤란을 겪고 있는 이승만에게 자금을 마련하여 보내는 일이었으므로 친지의 소개로 함경남도의 실업가인 이태완(李泰完)과 손잡고 유망한 금광 개발에 착수하였다. 자본은 약 10만 원 정도면 될 것이라고 하여 그는 평안북도 후창(厚昌)에 있는 중흥광산(中興鑛山)에 손을 대고 이태완과 함께 공동경영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만한 거금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윤치영은 우선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 교수로 있던 사촌형 윤치왕에게 청하여 착수금 2만 원을 약속수형(約束手形)으로 받아냈다. 그러나 윤치왕 박사가 현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약속 수형을 내면서 그의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
  •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친구와 친지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지만 냉담하게 거절당했다. 조선총독부의 고문과 감시, 파산 이후 경제적인 빈궁함과 주변의 무시, 조롱, 친한 친구와 지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외면 등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회의와 함께 냉소적인 인간관을 품게 된다. 이후 각종 회식이나 모임 자리에 나가는 일을 스스로 기피하였고, 홀로 독서와 사색에 빠졌다.
  • 한편으로 1942년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 출연하자 윤치영은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안재홍, 장택상 등과 함께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였다. 이후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였다.
 
1943
 
  • 1943우리 조선 청년을 영광스러운 일본 해군의 자랑스러운 대열로 받아들인 데 대하여 제국 정부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파격의 영광인데 어찌 주저할소냐. 개인과 가정, 일본과 세계 인류를 위해 총출진하라발표하였다.
  • 그러나 그가 끝까지 창씨개명에 반대했다는 점, 이승만과 연락하면서 일제의 패망을 주장했다는 점 등이 지목되고 있다.
  • 윤치영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었음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도 이런 칼럼과 단체에 명단이 올려져 있는 것을 두고 수시로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언제나 그들의 감시하에 있으면서 집과 대화숙 사이를 왕복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의 집에는 항상 일본군 헌병 군조(중사급)이 파견근무를 하였다.
 
1944
 
  • 19449, 국민총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을 맡았다.
  • 194411월 안재홍의 방문을 받았다. 안재홍의 말은 엔도(遠藤) 정무 총감이 나와 여운형을 만나보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윤치영은 패전이 짙어가는 마당에 무슨 수작인가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에 의하면 ‘1944718일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총사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이 구성된 지도 여러 달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협력을 가장하고 중국 동부에 괴뢰정권을 세웠던 왕조명(王兆銘, 개명 王精衛)은 같은 해 11월에 병사라는 구실하에 제가되었다. 민세의 말은 엔도가 몽양과 윤치영과 자기 세 사름에게 남경으로 가서 왕정위(王精衛)를 만난 뒤 장개석을 찾아가 일본이 중국과 휴전하는 화평 교섭을 펼 수 있도록 일본 정부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윤치영은 이 사람이 기가 찬 소리를 한다고 하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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