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3일 금요일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일본에게 승리하다

당시 일본을 상대로 거둔 승리에 대한 환호는 축구 민족주의라 해도 좋을 만큼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동아일보1954316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14일 일본 동경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세계축수선수권대회 극동예선, 한일 축구 제2회전에서 한국팀은 22 동점 무승부로 끝마쳤으나 지난 7일의 제1회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결국 1-0으로 일본군을 압도하고 세계축구선수권대회 아시아 대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됐다. 이 날 경기장에 운집했던 재일교포들은 일본에 거주한 이래 최초요, 최대의 감격과 기쁨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특히 이 날 운동장에는 일본 축구 사상 그 유례가 없는 3만 명이라는 관중이 운집해 응원단의 성원과 노랫소리로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 해군 300명이 흰 모자를 열광적으로 흔들면서 이채로운 응원을 보내 일본 응원단을 무색하게 했다.”
 
일제 36년간 단일팀간의 한일(韓日) 경기는 많았지만 국기를 달고 맞붙은 건 이 경기가 처음이었다. 또 한국 축구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바 있었지만 월드컵은 첫 도전이었다. 극동 예선에는 당초 한국ㆍ일본ㆍ중국이 편성되었으나 중국이 기권함으로써 한국ㆍ일본 두 나라 중 하나가 다가게 돼 있었다. 국제축구연맹 규정에 따르면 양국에서 한 번씩 경기를 하는 홈 앤드 어웨이가 원칙이었지만, 절대 일본팀의 입국을 허용할 수 없다는 이승만의 반대 때문에 두 경기를 모두 동경에서 치러야 했다.
 
37일 눈비가 내리는 악천후 속에 진행된 1차전에서 한국은 51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반 16분에 실점했지만 2237세 노장 정남식이 동점골을 터뜨리고 최정민(2), 최광석, 성낙운이 연속으로 골을 추가했다.
 
대표팀의 최고 노장은 39세인 박규정이었는데, 그때는 30대 선수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당시 22, 대표팀의 막내로 11어시스트를 기록했던 최광석의 회고다.
 
바로 50년 전 31절에 하네다 공항에 내려 일본 땅을 밟았습니다. 워낙 반일 감정이 드높은 때인데다 해방 후 일본과 벌이는 첫 스포츠 대결이라 마치 전쟁을 하러 적진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지요.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게 지면 현해탄에 모두 빠져 죽으라고 했다는 말은 나중에 누가 지어낸 것 같은데 그때는 일본에 패하면 국내에 돌아오기 힘들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군용기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려 열차로 서울에 올라오는데 부산ㆍ대구ㆍ대전 등 역마다 플래카드를 든 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열차안으로 사과ㆍ곶감 등 과일 상자들이 마구 밀려 들어왔어요. 그리고 서울역에서 이기붕 대한체육회장과 광장을 꽉 메운 시민들의 환경을 받고 경무대로 직행했죠. 감격한 이승만 대통령은 뭘 원하느냐고 물었지만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사람들이 있어 요구사항은 제대로 못 전하고 끝났어요.”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2, 15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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