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2일 목요일

이승만의 족청계 제거, 이기붕의 자유당 장악

이승만은 195285 정부통령 선거에서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 무명 인사 함태영의 부통령 당선은 천하의 족청도 경찰과 관료조직 앞에선 속수무책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 족청계의 자유당 장악

 
분노한 이범석은 감히 이승만을 비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선거에 경찰이 깊이 개입한 사실을 규탄하면서 장택상과 김태선을 고소하였다. 아직까지는 자유당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족청계는 1952829일 김태선, 930일에는 장택상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족청계는 반()족청계의 숙청을 단행하여 중앙당에서 지방당에 이르기까지 자파 인사를 심어 자유당을 장악하였다.
 

# 이범석을 경계한 이승만

 
그러나 이를 내버려 둘 이승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이범석의 부통령 당선을 원치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도 야심만만한 이범석의 패기가 아니었던가. 이범석의 족청 파워가 워낙 세 이범석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풍설까지 나돌았는데, 그런 이범석을 부통령 자리에 앉힌다는 건 연로한 이승만으로선 권력 누수는 말할 것도 없고 장기 집권도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범석과 더불어 족청계를 이끌었던 안호상은 이승만이 이범석을 경계하게 된 데에는 이승만 측근의 모략도 작용했다고 말한다.
 
하나의 예로 정부통령 선거 때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 박사의 포스터보다 부통령 후보였던 이범석 장군의 포스터 하나가 약간 컸다고 해서 이를 대통령을 무시하는 행위라 보고하는 지경이었다. 그 한 장의 포스터는 붙이는 과정에서 우연히 부통령 것이 약간 크게 붙었던 것이다.”
 

# 자유당 개편을 시도한 이승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범석이 부통령이 되는 걸 방해했던 이승만이 족청계의 자유당 장악을 내버려 둘 리는 만무했다. 이승만은 우선 자유당의 부당수였던 이범석 제거를 위해 당수제를 폐지하고 중앙위원회를 자유당 산하 5개 기간단체로부터 각 3명씩으로 구성케 하는 등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1953820일 전당대회에서 족청계는 당 조직을 족청계 일색으로 개편하고 중앙위원들도 족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하였다.
 
이승만은 1953921일 자유당에서 족청파를 축출하고 당을 정화, 재건하라는 요지의 특별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족청계 제거를 위해 김창룡의 특무부대까지 투입하였다. 112일 이승만은 새로운 9인 부장의 당 간부를 임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중앙으로부터 지방의 세포조직에 이르기까지 족청파를 축출하고 당내조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이승만은 각 부장을 자신이 직접 임명하였으며, 이기붕을 총무부장으로 기용하였다. 새로 구성된 부장단은 1954130일 이범석을 비롯하여 족청계의 지도급 인사 16명을 제명 처분하는 것을 시작으로 당내의 족청계를 완전히 일소하고 당 조직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 이기붕 중심의 자유당 체제 확립

 
그렇게 함으로써 이기붕 중심의 당 체제가 서게 되었는데, 19543월에 열린 자유당 제5차 전당대회가 족청계 제거를 공식적으로 알린 행사였다. 이기붕은 이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반대파인 배은희와 이갑성을 축출하고 당 조직을 장악하였다.
 
이기붕을 중심으로 한 전직 관료 출신이 당 조직의 실권자로 등장함에 따라 자유당은 과거에 비해 더욱 관료조직과 경찰조직에 의존하게 되었다. 김경순에 따르면,
 
사실 족청계까지도 제거된 자유당은 전혀 조직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했고 따라서 내무부장관 지시하에 움직이는 경찰과 지방의 각 행정조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그들의 역할은 보다 중요해졌다. 좌우익의 대립, 1950년의 전쟁, 1953년 이후의 공비 토벌에서 억압적이고 전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관료ㆍ경찰 조직은 이승만 정권의 유지를 위해 각종 국가 정책을 권장하는 억압적 권력부대가 되었다.”
 

#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안호상

 
19546월 안호상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안호상이 누군가? 그는 이승만이 부르짖었던 일민주의라는 극우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그였을 뿐만 아니라 이범석과 더불어 원외 자유당 창당의 1등 공신이었다. 이승만은 내켜 하지 않는 안호상을 불러 대한청년단을 이끄는 당신밖에 정당 만들 사람이 또 어디 있느냐며 부추겨서 원외 자유당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치하에선 극우 이념의 소유자라도 이승만의 눈 밖에 나면 언제든지 빨갱이로 몰릴 수 있었으며, 이 점에선 안호상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호상은 54520 선거에서 족청 동지였던 무소속 후보 김동욱을 위한 후원 연설을 해주었는데, 김동욱이 자유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게 화근이었다. 자유당이 안호상을 벼르고 있었으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 민병대를 격려한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

 
안호상은 1954610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5천여 명의 민병대가 참석한 민병대 훈련 강조기간 기념대회에서 10여분 동안 격려사를 하였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 등 각 방면은 썩을 대로 썩었다. 만일 공산군이 다시 남침한다면 모리배와 정치가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갈 것이다. 그러나 최후까지 피를 흘리면서 조국에 남아서 조국을 지킬 이는 오직 민병대원 청년동지 여러분뿐이다. 여러분은 자본제국주의와 공산제국주의를 막아내어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동시에 또 조국의 운명을 망치고 민족 정치를 파괴하는 악질 정치가들을 물리치는 것이 책임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 구속, 병보석, 재판에 시달린 안호상

 
이튿날 안호상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죄목은 내란선동죄, 국가보안법 위반, 선거법 위반, 북한괴뢰정권 자진해 돕기 등이었다. 경찰의 심문은 김동욱 후원 연설 내용과 충무로 광장 연설에 집중되었다. 안호상은 경남경찰국 유치장에 갇혔다.
 
안호상은 얼마 후 병보석으로 나오게 되었고 결국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이후 3년간 재판에 시달려야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안호상이 해온 일이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할 정도의 죄를 지은 건 아니었지만, 이는 비단 안호상만 겪은 비운은 아니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2, 15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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