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

이인(李仁, 18961026~ 197945)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는 자옥(子玉), 본관은 경주, ()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896
 
  • 1026, 경상북도 대구부 중구 사일동(射一洞)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 약간의 소아마비 증세를 앓고 있었으나 생활이나 대화하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소아마비를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한다. 1896년 같은 해에 태어난 김두종, 윤일선, 이병도, 이인, 이희승 등은 만년에 동갑 모임을 만들어 돈독한 우정을 나누곤 했다. 태어난 해가 병신(丙申)년이어서 모임 명칭은 병신회로 하였다. 병신회의 회장 선출을 놓고 설왕설래하던 중 애산 이인이 병신회 회장이야 당연히 내가 맡아야지라고 해서 만장일치로 애산을 회장으로 옹립했다고 한다.
  • 할아버지 이관준은 영남의 명망가이자 성리학자였고, 삼촌 이시영은 독립운동가로 순국하였다. 아버지 이종영은 대한제국 당시 애국 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와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계몽운동가였다.
  • 이인은 어릴 적에 대구향교와 동제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이후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달동의숙(達東義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경북실업보습학교(慶北實業補習學校)로 진학하였다.
 
1912
 
  • 1912경북실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 1912년 일본에 건너가서 세이소쿠 중학교(正則中學校)를 다녔다.
 
1914
 
  • 1914년 세이소쿠 중학교(正則中學校)를 졸업하였다.
  • 1914년 그해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1916
 
  • 1916년에는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 수료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에 편입했다.
  •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원과정인 일본대학 고등전공과(高等專攻科)에 진학, 공부하였다.
 
1917
 
  • 1917년 귀국했다.
 
1919
 
  • 9,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2
 
  • 1922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23
 
  • 19235월 경성부에서 변호사ㆍ변리사 개업을 하여 7첫 변론으로 의열단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 이후 계속 민족운동사건의 변론을 맡아 610 만세 운동ㆍ고려혁명당 사건ㆍ의열단 사건ㆍ원산총파업ㆍ통의부사건ㆍ정의부사건ㆍ신간회민중대회사건ㆍ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각종 소작쟁의, 필화(筆禍)ㆍ설화(舌禍) 사건과 친일파나 일본관리의 암살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고, 자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그가 맡은 변호만도 약 15백여건에 달한다.
  • 일제강점기 당시 가인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 변호를 하면서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명망을 날렸다.
 
1924
 
  • 1924년에는 최윤동(崔允東)ㆍ이수영(李遂榮)ㆍ송두환(宋斗煥) 등이 대구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검거된 경북중대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1925
 
  • 1925년에는 조선 최대의 사상사건이라 평가되는 조선공산당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 이후 장택상 등과 고학생의 상조(相助)기관인 갈돕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는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6
 
  • 1926610만세운동 관련 사건을 맡아 주권을 읽은 백성은 옛 주인마저 잃었다. 이 어린 학생들이라도 어찌 한 방울의 눈물과 분노가 없겠는가라는 유명한 변론을 남겼다.
 
1927
 
  • 1927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30
 
  • 1930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興農社) 사건을 변호하다 법정에서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 혐의로 6개월 동안 변호사 자격정지 및 정직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
 
  •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다.
 
1932
 
  • 1932년 조선발명학회장에 추대되고 조선과학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5
 
  • 1935년에는 이우식(李祐植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 1935년에는 조선기념도서출판관(朝鮮紀念圖書出版館)을 조직하여 그 제1차사업으로 부친의 회갑을 기념하는 도서로서 김윤경(金允經)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를 간행하여 민족출판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하면서도 그는 국선변호인이 아님에도 변호비용을 받지 않아 독립지사와 민중들의 감격을 받기도 했다.
  • 이후 언론탄압반대연설회 등으로 여러 차례 유치장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를 비밀리에 지원한다는 혐의로 곽상훈 등과 함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1936
 
  • 1936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소환하기도 했으며, 조선총독부는 그의 변호사 면허를 취소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깨끗한 처신으로 흠을 잡을 수 없었다.
 
1939
 
  • 193912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1
 
  • 1941창씨개명 강요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1942
 
  • 1942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의 보급과 한글의 출판관계를 일체 금지하고 한글학자들과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1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3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45
 
  • 1945년 광복이후 백관수, 김병로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안재홍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나, 건준위원장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 9,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창당에 참여, 당무부장이 되었다. 당 최고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 8인의 총무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 10, 미군의 한반도 주둔 이후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首席大法官) 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군정청 특별범죄심사회 수석대법관이 되면서 그는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 194512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1946
 
  • 1946군정청 검찰청 검찰총장이 되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의 수사를 지휘하는 등 좌파 세력의 근절에 노력했으며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7
 
  • 1947년 군정청 대법원장
  • 1947년 이후 단독정부 수립론이 나오자 그는 단정론을 지지하였다.
 
1948
 
  • 1948검찰청 총장
  • 19488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법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어 반민특위법이 제정되었을 때, 이인은 다음과 같이 반민법에 반대를 표명했다.
    - 새로운 출발의 시기에 또다른 민족분열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 지역적으로 남한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것은 법의 평등원칙에 어긋난다.
    - 민족반역자 색출에 있어 악질적인 괴수에 그 처벌을 국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절충안을 작성하였다.
 
1949
 
  • 3,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인 장면이 주미대사 임명 관계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그는 보궐선거에 출마하였다. 3월의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제헌 국회 의원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19491221~ 1950530)]
  • 6,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하였다.
  • 6월 경찰의 반민특위 특경대 습격사건 이후 77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인은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신변보호를 담당하던 경찰마저도 모두 철수시켜 더이상 반민족 행위자의 체포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나아가 이인은 반민특위 해체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그나마 기소된 친일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 반민특위 해체의 날(920) 이인 위원장의 담화는 다음과 같다.
    “반민특위의 사업에 대한 견해는 사람에 따라 달라 용두사미로 그친다는 비난의 소리도 높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기도 아니고 너무 세밀히 한다고 불평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가장 심했던 자만 처단하고 나머지는 관대히 처리해서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도리다. 사람을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민주정신을 징계하려는 것이니 이 정도로 이일징백의 효과를 거두어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 38선이 그대로 있고, 시국이 혼란하고, 인재가 부족한 이때 반민족행위 처단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민족과 국가를 위함이 아닐 것이다.”
 
1950
 
  •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피신하여 납북 위기를 모면하였다.
 
1954
 
  • 1954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현역의원인 류홍(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7
 
  • 1957년에는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범야세력 통합운동을 벌였다.
 
1958
 
  •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구 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윤보선(민주당), 정기섭(자유당)에 이어 3위로 낙선하였다.
 
1960
 
  • 1960419 혁명이 일어나자 재야정치인들과 함께 이승만(李承晩)의 하야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참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2
 
  •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다.
 
1963
 
  • 1963년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 19638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 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
  • 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965
 
  • 1965년 일송 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
  • 1965년 이인은 안재홍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집행, 주관하였다. 당시 안재홍은 자진월북자라는 오해와 편견으로 금기시되었고, 꺼려했다. 그러나 이인은 이범석 등과 함께 안재홍의 시신없는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군사정권은 그의 의도가 불순함을 의심하여 내사하였으나 혐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1967
 
  • 1967년 제헌동지회회장
 
1969
 
  •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
 
1972
 
  • 19721월 고 상허 유석창 장례위원회 위원장
  •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에 선임되었다.
 
1974
 
  • 1974년에는 통일원 고문에 재선임되었다.
 
건국대학교ㆍ명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
 
  • 45, 유언에 따라 재산은 한글학회에 기증되었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장지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북양리 산51번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법률과 경제법률과 여성애산여적 愛山餘滴반세기의 증언등이 있다.
 
2011
 
  • 2011년 대전현충원(독립지사 제4묘역)으로 이장하였다.
 
2013
 
  • 2013년 대구에서 애산이인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2016
 
  • 대구변호사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옹호에 공이 있는 사람이나 단체를 포상하는 애산인권상2016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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