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 ~ 1956년 4월 28일)

김상덕(金尙德, 18911210~ 1956428)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임정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었다. 본관은 경주, 호는 영주(令洲). 경상북도 고령 출신.
 
1891
 
  • 1210, 경상북도 고령군 저전동(현 고령읍 저전리)에서 소농의 아들(5)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성옥(金聲玉), 어머니는 김경익(金敬益)
 
1896
 
  • 5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저전동 근처 내상리 소재 내산서당(乃山書堂)에 들어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문하에서 19살 때까지 한학을 수학했다.
 
1912
 
  • 21세가 되던 19124, 경북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그만두었다.
 
1915
 
  • 고령공립보통학교를 그만 둔 김상덕은 1915년 경성부로 올라와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
 
  • 1917년에는 과거 16세 때 부모가 짝지어 준 합천군 출신의 강태정(姜泰貞)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경신중학교 다니면서 그는 낮에는 목수일로 학비를 벌고, 밤이면 공부하면서 20대 초반의 청년기를 경신학교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경신학교 다니면서 기독교에 접하게 되고 신학문을 배우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갖게 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적인 신학문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 3, 경신학교 졸업 후에는 전문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집안에서 유학비용을 댈 수 없는 처지여서 모교 경신학교를 통해 알게 된 기독교 계열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일본 도쿄에서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 유학생들과 민족운동의 방안을 마련하려 노력하였다.
 
1918
 
  • 그러나 일본 유학 중 19187월 일본에서 물가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 학업 생활이 어려워지자, 김상덕은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와세다 대학 중퇴)하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고 한다.
 
1919
 
  • 191916,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날 행사는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하는 모임으로 확대되었고, 선생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발송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어 김도연ㆍ백관수ㆍ최팔용 등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였다.
  • 2, 28독립선언에 참가하였다. 이것과 관련하여 일제에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6월 일본법원은 그에게 금고 7개월 15일을 선고하였다.
 
1920
 
  • 29, 출옥하여 곧장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 35, 상해에 도착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출신 의원을 선출되었다.
 
1922
 
  • 121일부터 22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56명의 한국측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대회 도중에 열린 극동혁명청년대회에도 21명의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대회는 192111월부터 미국이 주도하여 열린 워싱턴대회에 대항하는 회의였다)
  • 3월 중순, 상해로 돌아와 국민대표회와 관련된 일에 몰두하였다.
 
1923
 
  • 1월부터 5월까지 국민대표회의에 경상북도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2,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을 때 그는 개조파에 가담하였다.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의 주장에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
 
  • 192445, 상해청년동맹회를 결성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창립총회 첫 순서인 개회사를 맡았고, 10명의 집행위원과 5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 이후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磐石縣)으로 가 김동삼 등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서 기관지 농민보(農民報)를 간행하였다. 이후 정의부에 참가했으나, 1928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회의가 결렬되자, 김동삼을 따라 혁신의회(革新議會)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 이후 만주로 활동역역을 옮겨 길림성에서 한족노동당을 결성하였다. 한족노동당은 친일세력을 제외한 민족 구성원 모두가 평균적으로 평등한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우선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강령을 내건 민중 지향성이 강한 진보 조직이었다.
 
1927
 
  • 9월에 개편된 ML그룹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남만주지역의 당 조직부장이자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회의를 열기 위해 찬동자를 구하는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28
 
  • 2,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으로 개편되었고, 김상덕은 중앙집행위원 겸 책임비서를 맡았다.
  • 시사연구회에 가담, 1928년 시사연구회 집행위원장으로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어 같은 해 12월에 지린(吉林)에서 혁신의회와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 19285월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하나의 당을 결성하기 위한 민족유일당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기존 단체를 중심으로 유일당을 결성하자는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全民族唯一黨協議會)와 기존 단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 중심의 전민족유일당촉성회(全民族唯一黨促成會)로 분열되었다. 김상덕은 이청천ㆍ김동삼ㆍ김원식 등과 정의부를 탈퇴하여 전민족유일당촉성회에 가담하였다. 그 후 김좌진ㆍ김승학 등과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민족유일당 결성을 목표로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결성하였으나 국민부(國民府) 출범으로 19295월 해체되었다.
 
1930
 
  • 7, 북만주에서 혁신의회를 이은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1
 
  • 9,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당은 11월에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고, 선생은 한국독립군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북만주의 한국독립군은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는 정치성향의 중국인 무장부대와 원만한 협동작전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1933
 
  • 2, 한국독립당은 중국국민당의 무장부대와 협동작전이 전개되지 못하는 문제점을 타개하고자 중앙대회를 열고 김상덕과 신숙을 남경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국독립군도 1933년 말경이면 사실상 와해되었고, 북만주의 중국인 무장부대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통제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주에서의 유일당운동은 참여한 독립운동단체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결렬되었고, 일제의 만주 침공 이후 1933년 선생은 다시 중국 본토로 되돌아왔다.
 
1934
 
  • 4,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된 신한독립당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신한독립당의 중앙청년부장]
 
1935
 
  • 4,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 193210월 결성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우리들의 유일한 출로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여 우리들의 독립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함에 있으며 당면의 제일 긴급한 일이 전선통일의 문제이다고 보고 통합을 논의하였다.
 
1936
 
  • 1, 조선민족혁명당 17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 19357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김상덕은 창립 당시 김원봉이 부장으로 있는 서기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상해의 한국독립당 세력이 이탈하였다.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남경으로 왔던 홍진도 이탈하였다. 이어 19374월 이청천이 이끄는 조선혁명당 세력이 이탈하였다. 김상덕은 한 때 만주에서 이청천과 함께 촉성회파와 한국독립군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상덕은 두 번의 기회에서 모두 이탈하지 않았다.
 
1937
 
  • 7,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민족혁명당은 남경에서 우한으로, 다시 구이린을 거쳐 중경에 도착하였다. 선생도 조직을 따라 함께 이동하였는데, 그러는 와중에 간난 아기인 막내딸을 잃었다. 또한 중경에 도착하자마자 부인이 운명을 달리하였다.
 
1940
 
  • 민족혁명당의 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에 합류해 본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
 
  • 5월 민족혁명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에 열린 민족혁명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도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민족혁명당의 군대였던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하였다.
 
1942
 
  •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요청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김상덕은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경상도 대표로 당선되어 1026, 34회 임시의정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그는 우리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단 기간 내에 중, , , 소 등 연합 각국 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자는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그의 제안은 이듬해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의 승인 및 독립 운동의 원조를 위하여 외교 대표를 미, , 소 등 연합국에 파견하여 상주하게 하는 법률안으로 수정되어 통과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문화부장 역임
 
1943
 
  • 410,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김규식 선전부장을 비롯하여 15명으로 구성된 선전부 선전위원회의 위원에 김상덕을 임명하였다.
  • 이 해에 조선민족혁명당창립경과급기약사(朝鮮民族革命黨創立經過及其略史)를 쓰기도 하였다.
  • 525, 학무부 차장에 선임되어 61일부터 근무하였다.
 
1945
 
  • 319일부터 학무부장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된 것이다. 한편 선생은 동시에 민족혁명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훈련부 책임자로 활동한 것이 그것이다.
  • 1123,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 임정요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 1224, 한국 소년국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6
 
  •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다.
  • 2,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 629,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식에 참석,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에 추대되었다.
 
1947
 
  •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625 전쟁 때 납북될 때까지 계속 재직)
 
1948
 
  • 19485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민족통일본부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경북 고령)되었고, 국회에 입성하였다. 61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9
 
  • 1949년 이인, 곽상훈 등과 반민특위를 구성, 반민특위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98월까지만 반민특위가 활동한다는 특별법 개정안이 76일에 통과되자 다른 위원들과 함께 일괄 사표를 제출하였다)
 
1950
 
  • 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고 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곽태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1950년 서울에 체류중 625 전쟁으로 북한에 피랍되었다.
 
1956
 
  • 1956428일까지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하여, 평양시 룡성구역 룡흥1동에 조성된 재북 인사 62명의 유해가 안치된 재북인사의 묘에 안치되었다.
  • 북한총람에 의하면 남북된 인사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중앙위원이었으며, 195812월 숙청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아들 김정육 선생은 부친이 납북되면서 그 후의 성장기를 어렵게 보냈으며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으나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50세가 되도록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40세가 넘어서 만난 부인과 잠시 단란한 삶을 꾸렸으나 얼마 뒤 부인이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정육의 하나 있는 아들 김진영마저 2017825일 세 살짜리 딸과 만삭의 아내, 그리고 팔십이 넘은 부친을 남겨둔 채 암으로 38세에 숨을 거두었다.
 
1990
 
  • 1990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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