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김상돈(金相敦, 1901년 6월 9일 ~ 1986년 4월 30일)

김상돈(金相敦, 190169~ 1986430)
 

대한민국의 정치인, 공무원이며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01
 
  • 69, 항해남도 재령에서 김정연(金貞淵)의 아들로 태어나다.
 
일본으로 유학, 일본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메이지 학원 신학부 재학 중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5
 
  • 1925년 일본 메이지 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해 조선일보사에 취업하여 취재부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문화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28
 
  • 그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 1928태평양종교대학 사회사업과를 졸업하였다. 재미 대한인 국민회 교육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 후 다시 농촌교화사업을 벌이고 조선일보사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친일 부역 조직인 망원합정 정대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1945
 
  • 1945조선일보의 취체역 이사가 되고, 그해 광복이 되자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1950년까지 조선일보사에서 취체역(取締役)으로 근무하였다.
 
1948
 
  • 1948년 남북협상론과 단정수립론이 나타날 때 단정수립론을 지지하여 그해 510제헌국회의회 의원에 서울 마포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유진산(무소속), 오성환(무소속), 김선(조선여자국민당) 등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 194862일 제3회 본회의 당시 김준연,백관수과 함께 연락위원으로 뽑혔다
  • 19481023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위원장은 김상덕이었고, 부위원장은 김상돈이었다.
 
1949
 
  •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민족항일기 때의 부일협력자들을 선별, 처벌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이승만정권과 갈등하였다.
  • 1949년에 지프차를 운전하다가 마포에서 어린이를 치어죽인 흑역사가 있다. 김상돈은 이걸 업무상 과실치사로 공판 청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밀장(남몰래 지내는 장사, 암매장을 의미)과 사망일자를 전일로 소급하여 공문서를 작성한 건 김상돈의 호위기관인 안현모에게 있다고 했다.
    金相敦 과실치사사건 제1회 공판 개정
    지난 227일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김상돈(49)의원이 지프를 운전하고 아현동 로터리를 통과하던 중 아현동 산 7번지에 사는 鄭漢鎭(8)군을 깔아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지난 6월 이래 서울지방검찰청에서는 그 진상을 조사중에 있던 바, 의원은 동 소년의 시체를 호위경관 安賢模를 시켜 마포구청원 吳鳳甲, 마포경찰서원 兪順材와 상의하여 허위매장증명서를 작성하여 매장한 사실이 판명되어 김의원 등 4명은 과실치사변사자 밀장, 허위문서 작성 교사 등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는데 피해자 가족측으로부터도 이 기소에 부대하여 위자료청구 私訴를 제기한 바 있었다.
    이리하여 이 사건 심리를 위한 제1회 공판이 20일 상오 11시부터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林漢慶 판사 주심으로 개정되어 피고인 김상돈씨 이하 3명에 대해서 사건발생 당시의 경위에 관한 사실 심문이 있었고, 이어 변호인측으로부터 간단한 변론이 있은 후 하오 020분경 폐회하였다.
    [
    자유신문 19491221]
 
1950
 
  • 반민특위를 사퇴한 뒤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에 입당, 19505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마포구갑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오성환에게 패하고 낙선하였고, 그해 한국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1954
 
  • 19543대 민의원의원 총선에서 민주국민당으로 출마하여 자유당의 오성환을 누르고 당선되고 이후 자유당, 대한국민당 등을 상대로 투쟁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해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 195412뉴델리 밀서조작사건의 직후, 그의 집에 북조선 인민위원회 최고위원회 명의로 된 남북협상을 호소하는 촉구문이 그의 집에 투입되었다.
 
1955
 
  • 1955년에는 자유당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야당연합인 민주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였다.
 
1957
 
  • 1957민주당 중앙훈련소장을 지냈다.
 
1958
 
  • 195854대 민의원의원 총선에 출마하여 79.52%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하였고,
 
1960
 
  • 196054.19 혁명 후 5대 민의원의원 총선에 출마하여 77.66%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민주당 구파의 지도급인사가 되었다. 그해 7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민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자로 출마, 당선되어 초대 민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김상돈 217,47560.25%, 장기영 117,14532.35%]
  • 19605205.16 군사 정변 결과 사직하였다.
 
1962
 
  • 1962년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에 선정, 정치규제로 묶여 경기도 시흥군 안양으로 내려가 농축업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그해 6월에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이주당 사건의 배후로 몰려 장면과 함께 군사법정에 소환, 재판을 받기도 했다. 3개월간의 소송 끝에 19629월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1963
 
  • 1963년 정정법 해제와 동시에 정계 복귀하였다.
 
1967
 
  •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곧 정계를 은퇴하였다.
 
1969
 
  • 1969년 박정희의 대통령 3선개헌 논의가 표면화되자, 박정희, 윤치영의 3선개헌안에 정면 반대, 개헌반대투쟁위원회에 참여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 1969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1970
 
  • 1970년 신민당에 재입당하여 반정부투쟁에 매진하였다.
 
1971
 
  • 1971525,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구공화단 이병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병희 37,636, 58.22%, 김상돈 26,27740.65%]
  • 1971년에는 김대중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반대하여 박기출, 장준하 등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하였다.
 
1972
 
  • 19721017일 조직된 윤보선의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3선개헌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확정되자, 각종 규제가 나타날 것이라며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정치망명을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국의 독재정권의 현실을 지적하고 반 독재정권 홍보 활동을 한다
  • 일찍이 그는 1928년 미국에서 재미한국인국민회 교육부장으로 활동한 바 있는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박정희 정권이 애국심을 빌미로 독재를 합리화한다며 반정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86
 
  • 1986430,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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