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 2월 22일 ~ 1799년 12월 14일
- 임기 : 1789년 4월 30일 ~ 1797년 3월 3일
-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은 미국의 국부(國父)
- 출생지 : 버지니아주 폽스크리크(Pope's Creek)
- 부인 : 미사 댄드리지 커스티스 워싱턴(Martha Dandridge Custis Wahington, 1731~1802)
- 자녀 : 없음 / 부인의 전남편 아이 2명
- 부통령 : 존 애덤스(J. Adams)
조지 워싱턴은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국부이자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미국 수도(워싱턴 D.C.)와 주(워싱턴 주)의 이름이 되어 오늘도 살아 있다. 워싱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그가 미국의 첫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선출되었고, 아무도 겪어보지 않은 선출직 지도자로서 아무런 선례가 없는 상태에서 차례차례 훌륭히 난관을 극복해나가며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주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 교육은 15세까지만 받았다. 그는 토머스 재퍼슨(3대 대통령)이나 제임스 메디슨(4대 대통령)처럼 역사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아이디어맨도 아니었지만 명석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남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어린 시절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이복형 로렌스였는데, 로렌스의 군대생활 이야기에 이끌려 영국 해군에 입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홀몸이 된 어머니의 만류로 해군 대신 토지측량관으로 15세부터 6년간 직업생활을 시작했다. 21세가 되어(1753) 버지니아 민병대에 입대하였고, 뒤에 영국군 정규군에 편성회더 프랜치-인디언전쟁(1754~1763)에 참전하여 싸웠다.
참전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마운트버넌 논장으로 돌아간 워싱턴은 그때 그의 부인이 될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버지니아주 최고 갑부였던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의 미망인이었다(1731년 출생, 1749년 커스티스와 결혼, 1757년 커스티스 사망, 1759년 워싱턴과 재혼). 1759년 마사와의 결혼으로 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 7,000에이커의 땅이 워싱턴의 재산이 되어 그는 토지만 2만 2,000에이커(약 3,400만평)나 되는 버지니아주 최고 갑부 중 하나가 되었다. 뒷날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뒤, 미국 연방정부 관리 전체의 수가 그가 소유한 노예수보다 적었으니 그가 세 번째 대통령이 되기를 거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운트버넌 농장에서 조용히 지내던 워싱턴은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 온갖 악조건과 싸우면서 끝내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독립을 성취하였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워싱턴은 아무 미련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1787년 버지니아주 대표가 되고, 드디어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789년 취임하게 되었다.
조지 워싱턴은 185cm의 큰 키에 당당한 체구로 어디에서나 돋보였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으나 군인으로서 워싱턴은 그의 인품만큼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첫 대통령으로서, 특히 권좌에서 깨끗이 물러나는 모습이 그를 영원하게 한 것이다.
미국이 탄생되고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이란 자리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대통령을 ‘선출한 왕’으로 생각했고 워싱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초기엔 그에 대한 칭호로 왕에게 붙일 수 있는 ‘전하’라는 단어를 좋아했고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위엄있는 몸가짐을 가지고, 왕처럼 대접받기를 원했다. 또 다른 나라 왕들이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듯이 워싱턴도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했다. 유럽의 왕실을 본받아 한없이 많은 접견회와 파티를 열었고, 영국의 국왕처럼 그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였으녀, 국민들은 국왕을 맞이하듯 화려한 축하행사로 그를 환영했다. 아마 그는 마음 속으로 미국도 언젠가 영국, 프랑스, 아니 그보다 더 강대한 제국이 되리라는 꿈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워싱턴의 제왕과 같은 언행으로 새로 태어난 나라 미국의 새로운 직책인 대통령 지위는 처음부터 강력해졌다. 즉 워싱턴은 그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미국과 대통령직을 구체화하는 업적을 이룩한 것이다.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1789년 이후 10년간은 미국 역사 그 어느 때보다 분열과 정치싸움이 심한 시대였다. 더욱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려는 연방주의자들과 주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는 반연방주의자의 투쟁이 극심하였다. 워싱턴은 내각에 두 파의 인물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균형을 잡아 자칫하면 유혈충돌로까지 번질 수 있는 사태를 조정했는가 하면, 수천명의 농민들이 납세거부운동으로 일으킨 위스키반란을 단호하게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해 정부의 위신을 세우는 등 억압과 조정을 정교하게 배합하여 지도자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1797년 두 번에 걸친 임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직에 계속 머물러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워싱턴은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의 신념에 신성한 사료로 살아 있다. 이 고별사에서 그는 무엇보다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인들에게는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을 경고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과 적대감을 경계하도록 했다.
임기를 마친 그는 미련없이 자신의 사저가 있는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고, 2년 뒤인 1799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운 두 번까지만 대통령 임기를 맞는다는 전통은 1940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깨기까지 철칙처럼 지켜져온 절제의 미덕이었다.
워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 대통령이자, 떠날 때 떠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미국인의 성자이다. 워싱턴은 귀족정치를 지지하고 또 왕처럼 행동하여 정치를 결코 대중화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중민주주의를 창조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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