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2대 대통령 : 존 애덤스(John Adams)
1735년 10월 30일 ~ 1826년 7월 4일
- 국가를 위해서 내 야망을 버린다!
- 연방주의자.
- 임기 : 1797 3월 4일 ~ 1801년 3월 3일
- 출생지 :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Braintree)
- 부인 : 애비게일 스미스 애덤스(Abigail Smith Adams, 1744~1818)
- 자녀 : 애비게일, 존 퀸시, 수재너, 찰스, 토머스
- 부통령 : 토머스 제퍼슨(T. Jefferson)
워싱턴의 뒤를 이어 제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애덤스는 사실 대통령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현명함과 풍부한 지식은 미국을 창조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며 다혈질의 기질은 정치적인 적을 많이 만들어서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애덤스는 당대 그 어떤 인물보다도 깊고 폭넓은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지금의 퀸시 Quincy)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마치고 1758년 23세의 나이에 이미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특히 영국의 법과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죽을 때까지 이 분야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애덤스의 과격하고 급진적인 성향은 6촌형인 새뮤얼 애덤스(1722~1803, 미국 독립운동가)에게 받은 영향이 크다. 1765년 인지조례법 반대투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고, 5년 뒤엔 놀랍게도 보스턴학살에 연관된 영국군 장교를 변호하기도 했다. 애덤스는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하는데 이때의 동지 제퍼슨은 뒷날 가장 큰 정적으로 변하여 그와 대립하게 된다.
그는 1780년 출신주인 매사추세츠주의 헌법 초안을 만들기도 했다. 독립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파리에서 영국과 독립협상을 벌이게 되었을 때 애덤스는 벤저민 크랠읔린, 존 제이와 함께 협상대표로 참가하여 1783년 미국 독립을 영국으로부터 승인받은 주역이었고, 1789년 미합중국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1797년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애덤스는 두 번째로 득표수가 많은 대통령 후보를 부통령으로 뽑던 당시의 제도에 의해 토머스 제퍼슨을 부통령으로 맞게 되었고, 제퍼슨은 임기 4년 동안 애덤스를 도와주기보다 끝까지 그의 정책에 반대하여 괴롭혔다. 그 이유는 제퍼슨이 철저한 반연방주의 세력의 중심지도자였고, 애덤스는 열렬한 연방주의자로 정치이념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자연 대통령과 부톨영 사이에 불화와 감정이 골이 깊어만 갈 수밖에 없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서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국, 프랑스와의 갈등이었다. 미국은 갓 태어난 보잘것없는 허약한 국가에 지나지 않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경쟁하는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미국을 무릎 꿇려 자신의 손아귀에 휘어잡으려고 으르렁대던 터였다. 특히 영국은 미국의 배드를 나포해 가고 미국 선원들을 영국군으로 강제 징용하는 등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거야.
애덤스는 영국과 전쟁상태에 있는 프랑스에 3명의 비밀특사에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XYX사건’으로 알려진 밀사파견사건이었다. 밀사들이 파리에 가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자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은 거액의 뇌물을 요구했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해밀턴 등 친영 반프랑스의 연방주의자 세력은 프랑스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요구했고, 그들에게 등을 떠밀려 애덤스는 선전포고도 없이 프랑스와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크게 높아져, 프랑스 등 외국에 협조적인 자들을 벌줄 수 있는 ‘외국인법’에 애덤스는 서명하였다. 이 법은 선동을 방지하고 간첩, 배신 행위를 막는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들의 입과 귀를 틀어막는 아주 비민주적인 법이었다. 자연 프랑스에 우호적인 제퍼슨 등 반영방주의자들의 반발은 거세어졌고 연방주의자들과의 싸움도 더욱 거세어졌다. 별다른 명분도 실리도 없이 분풀이 같은 전쟁을 벌이던 애덤스는 결국 프랑스와 휴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친영파인 연방주의자들이 격분하여 애덤스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애덤스는 미국의 국익을 위하여 밀사를 보내고 프랑스와 휴전을 했지만 정적인 반연방주의자들(제퍼슨파)은 물론 동지인 연방주의자들(해밀턴파)에게도 버림을 받은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소신있는 외교와 국정은 적과 동지 모두의 외면을 받았고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신경질적이고 급한 성격은 임기가 끝날 때도 그대로 드러났는데 제퍼슨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임기 마지막날 밤에 제퍼슨에 반대하는 존 마셜을 연방 대법원장에 임명하고 정부 요직에 자기파 사람들을 대거 임명하여 ‘심야내각’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셜의 대법원장 임명은 결과적으로 사법부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권한에서 독립하여 의회, 정부, 법원이라는 3권의 분리에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존 애덤스는 고향인 브레인트리로 돌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간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오랜 동지이자 적이기도 했던 제퍼슨과 마지막에는 화해를 하게 되었다. 1826년 7월 4일, 미국이 독립한 지 50년이 되는 독립기념일에 존 애덤스는 세상을 떠났다. 운명하기 직전 그는 “토마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 있는데...”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제퍼슨은 그보다 몇 시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야망을 기꺼이 희생했던 존 애덤스. 그에게서 진정한 지도자의 평가란 정치적 실패와는 관련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같은 이름의 그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는 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내 미국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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