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20세기와 근대성의 종말
우리가 교회사를 여러 시대로 구분하는 목적을 위해서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세기는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따라서 20세기란 1914년부터 현재까지를 말한다. 20세기 초의 합리주의 원칙들은 특히 과학과 기술에 적용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기치 못한 결과들이 발생했다.
근대의 절정기에, 인류는 축복받은 풍요와 즐거움의 시간 속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이성과 그 자매격인 기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북대서양의 산업화된 국가들(유럽과 미국)은 세계를 약속 있는 미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는 그러한 희망에 종지부를 찍었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러한 근대의 약속이 한낮 꿈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세계 도처에서 탈 식민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것 또한 근대성의 종말의 한 단면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지금까지 식민지 경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해 오던 근대의 약속에 불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식민지주의와 신식민지주의에 대항하여 정치적이며 지성적인 강력한 반발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건들이 교회의 생명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과정은 기독교의 세 지류(支流), 즉 동방 정교ㆍ로마 가톨릭교ㆍ개신교가 걸어온 길을 추적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동방 정교회 전체는 러시아 혁명과 그것이 동유럽에 끼친 영향으로 동요를 겪었다. 소련(현재의 러시아 국가연합)에 적용한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성이 제시한 또 다른 약속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이 되면서 분명해진 것은 소련의 국가 경영은 실패하였으며, 강력한 정부의 수십년간의 압제 하에서도 살아남은 러시아 교회가 새 생명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로마 가톨릭교는 근대성의 여러 가지 관점들과 다툼을 계속했다. 1958년 교황 요한 23세의 즉위와 함께 로마 가톨릭교는 근대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에 이어 세계는 포스트모더니티로 급속하게 나아가고 있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발달한 신학은 초기 세대가 취한 반발적 태도에 근거하기 보다는 근대성을 초월한 미래로의 전망에 근거해서 근대성을 끊임없이 비판하였다.
개신교의 경우, 유럽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낙관론은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미국에서는, 그 영향이 비록 미미하다 할지라도, 그와 유사한 것이 발생했다. 칼 바르트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타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20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발생한 시민권을 위한 투쟁, 사회적 갈등과 위기들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 기독교의 전통들 안에서 반식민지주의와 견줄만한 운동이 일어났다. 선교 사업의 결과 출현한 “신생” 교회들은 자신의 자치권과 복음을 자신의 상황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두 가지 놀랄만한 증거가 있는데, 오순절 운동과 해방신학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세계 전역에서 모든 여성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인종적, 문화적으로 소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 새로운 에큐메니즘이 생겨났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대개 선교 사업과 그에 관한 반영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신생” 교회들의 성장과 함께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선교운동에 있어서도 선교로 발생한 신생 교회들이 점차 능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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