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5일 금요일

미국 제4대 대통령 :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미국 제4대 대통령 :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 3권분립, 견제와 균형의 헌법을 창안하다
  • 민주-공화당
  • 1751316~ 1836628
  • 임기 : 1809년 3월 4일 ~1817년 3월 4일
  • 출생지 : 버지니아주 포트콘웨이(Port Conway)
  • 부인 : 돌리 페인 토드 매디슨(Dolley Payne Todd Madison, 1768~1849)
  • 자녀 : 없음
  • 부통령
    조지 클린턴(G. Clinton, 1809)
    엘브리지 게리(E. Gerry, 1813)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 독립 이후 재임중 또 다시 영국과 전쟁을 치른 첫 대통령이다. 당시의 미국은 태어난 지 20년밖에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3류 국가였으니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과 프랑스에겐 걸음마를 막 시작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숙적인 영국은 어떻게든 북미 대륙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미국도 친영파, 친프랑스파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결국 친프랑스파의 우세로 미국은 영국과 전쟁을 시작, 결국 승리하여 진정한 미국의 독립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제임스 매디슨은 버지니아주에서 부유한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뉴저지대학(지금의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법률가가 되었다. 그는 헌법의 아버지로 기억될 만큼 미국 역사에서 빛나는 존재이다. 그는 헌법 초안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상상조차 못한 권력의 분할, 즉 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부 셋으로 쪼개고 이 세 권력이 서로 견제, 균형을 잡도록하는 미국 언법의 기본원칙은 바로 제임스 매디슨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이 기본원칙은 미국 연방헌법은 물론 미국의 모든 주헌법 전체를 지배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그는 친구이자 동지인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반연방주의전선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자 매디슨은 국무장관을 맡아 일했으며 제퍼슨과 함께 민주-공화당, 즉 뒷날의 민주당을 창건하여 제퍼슨 민주주의를 열게 되었다.

 

이러한 능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매디슨은 심각한 오점을 남긴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첫 번째 임기에는 정부 내 친영-반영파 싸움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1812년 결국 별 명분도 의미도 없이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였고, 두 번째 임기에는 결국 영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긴 했어도 대통령관저와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수도 워싱턴이 영국군에 점령되어 짓밟히는 등 엄청난 전쟁 피해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밝고 사교적인 아내 돌리 도트의 인기가 높아 형편없는 지지도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영국군이 불을 질러 화염이 치솟는 대통령관저에서 돌리 도트가 워싱턴의 초상화를 껴안고 탈출했다는 얘기는 아주 유명하다.

 

전쟁의 승리로 매디슨의 인기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18151월 뉴올리언스전투에서 영국군을 격멸하여 전 미국의 영웅이 된 앤드루 잭슨의 빛에 가려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또 그는 애덤스 대통령이 서명 반포한 외국인규제법과 보안법을 반민주, 언론탄압의 악법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철폐운동에 앞장섰고 대단히 위험한 주장을 했다. 즉 미국이란 나라는 모든 주가 조건없이 연방법을 존중하고 따라야만 통일이 유지되는데 악법이라 하여 거부할 권리를 각 주가 갖게된다면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방을 거부하고 탈퇴해버릴 수 있는 근거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뒷날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남부가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동맹을 결성해 떨어져 나가면서 바로 매디슨의 선례를 들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매디슨의 나쁜 평판도 좋은 평판도 모두 영국과의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매디슨과 제퍼슨은 미국의 가장 큰 위험은 영국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 했다. 영국은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 정부의 태도에 강력한 응징을 택했고, 영국 해군에게 미국 선박을 나포 약탈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어차피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매디슨 정부는 영국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영국이 보강되기 전에 캐나다를 공격하여 전쟁의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전략이었지만 미국 군대는 그 수도 적고 우수한 지휘관도 없었으며 식량도 무기도 부족하여 결국 미국의 초기 캐나다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때마침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실패로 몰락하자 영국은 군대를 대거 투입하여 오히려 미국을 멋대로 짓밟기 시작했다.

 

18148월 영국이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해 미국을 패배시킨 블래든스버그 전투를 매디슨은 현장에서 목격함으로써 참혹한 패배를 몸소 체험한 유일한 현직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이 마음만 먹었다면 미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너무도 오래 계속된 프랑스와의 전쟁에 지쳐 겐트조약으로 대충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1812년 전쟁은 참혹했지만 어쨌든 미국의 승리로 끝났고 영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미국인들은 민족주의에 젖었다. 세계 최강인 영국도 미국이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비록 온갖 비난과 원망으로 얼룩진 전쟁이었지만 매디슨은 자신의 지도자철학에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전쟁 때 민족주의적인 미국 국가의 가사가 프랜시스 스콧 키에 시에서 비롯되었다.

 

5대 대통령으로 그의 후계자 제임스 먼로가 취임한 뒤, 제임스 매디슨은 18173월 고향인 몬트필리어로 돌아왔다. 사망하기 전 10년 가까이 제퍼슨이 세운 버지니아대학의 총장을 역임했고(1826~1836), 정치학자로서 헌법 옹호의 주장을 편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는 미국 정치학 고전으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미합중국 제4대 대통령 헌법의 아버지제임스 매디슨. 그의 이름은 위스콘신주 수도의 이름으로 영원히 살아 있다.

2022년 3월 24일 목요일

미국 제3대 대통령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미국 제3대 대통령 : 토머스 제퍼슨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의 아버지 여기 잠들다” - 토머스 제퍼슨 묘비명

HERE WAS BURIED THOMAS JEFFERSON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AMERICAN INDEPENDENCE

OF THE STATUTE OF VIRGINIA FOR RELIGIOUS FREEDOM

AND FATH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 Thomas Jefferson
  • 반연방주의자(민주-공화당), 1743413~ 182674
  • 임기 : 180134~ 180933
  • 출생지 : 버지니아주 구치랜드 카운티(Coochland County)
  • 부인 : 마사 웨일즈 스켈턴 제퍼슨(Martha Wayles Skelton Jefferson, 1748~1782)
  • 자녀 : 마사, 제인, 이름 미상의 아들, 메리, 우드슨, 비벌리 헤밍스, 매디슨 헤밍스, 이스튼 헤밍스
  • 부통령 : 아론 버(A. Bur, 1801), 조지 클린턴(G. Clinton, 1805)
    ☞ 일부 연방주의자들과 북부 연합을 만들고 1804년 에런 버가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해밀턴을 사살하자, 제퍼슨은 현직 부통령이 저지른 일에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1804년 미국 수정 헌법 제12조가 발효된후, 제퍼슨은 에런 버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지 않고 대신 조지 클린턴을 지명하였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폭넓은 교양과 재능을 지닌 인물로 벤저민 프랭클린과 더불어 18세기 최대의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평가된다. 그와 같은 대통령이 지도자였음은 분명 미국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제퍼슨은 190cm나 되는 거구로 워싱턴보다 체격이 당당했지만, 소탈하면서도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리고 수줍어하는 성격으로 8년에 걸친 대통령 재직 기간에 단 두 번 대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농장주이자 법률가였고, 외교관이며 건축가인데다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그리고 발명가이고 취미음악가이자 대학창립자이며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 앨버마를카운티(Albermarle County)의 유명하고 부유한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윌리엄앤드메리대학을 마치고 법률가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그는 유럽의 계몽사상과 인권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아 1769년부터 반영국투쟁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1776년 그 유명한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인물이다. 독립전쟁 기간에는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하여 버지니아주에서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절차를 시작했는데, 노예제도를 비난하면서도 노예를 소유했던 건국 초기의 많은 미국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제퍼슨은 노예제도로 인해 남북전쟁을 놀라울만큼 정확하게 예언했다.

 

그는 미국의 중앙정부를 지지했지만 각 주의 자유와 독립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한 미국을 농민의 나라로 생각하여 산업화를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다. 과연 제퍼슨은 반연방주의자들의 핵심인물로 연방주의자들의 핵심인물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대결하였다. 그는 연방주의가 왕당주의와 같다고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해밀턴의 추종자들은 왕관, 주교관을 쓰는 군주제를 갈망하고, 이것들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 Jeffersonian : 농민중심, 반연방주의, 친프랑스
  • Hamiltonian : 도시, 귀족적, 연방주의, 친영국, 상업, 산업중시

 

그의 주도 아래 각 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권리장전이 수정헌법으로 채택되었다. 1797년 부통령에 취임한 제퍼슨은 4년간 대통령 애덤스를 돕기보다 계속 대뎔하였는데, 특히 위헌적인 보안법 철폐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 외국인규제법과 보안법(Alien and Sedition Act)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은 애덤스의 재선을 막고 자신이 당선됨으로써 미국 역사 최초로 평화적 정권이양에 성공한 기록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반연방주의자들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미국 최초의 정당이 태어나게 되었다.

 

또한 제퍼슨은 트리폴리에 출몰하는 해적의 진압을 돕기 위해 미군을 보냈는데 이것이 미국 역사 최초의 해외파병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제퍼슨의 최대 업적은 바로 루이지애나의 구입이었다. 루이지애나의 구입으로 미국의 영토는 두 배로 늘어났고, 그 넓은 미개척지야말로 미국의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쓸모없는 땅에 큰 돈을 쏟아붓는다는 비난에 대해서 제퍼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대는 저 끝없는 서부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찌 행복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루이지애나의 구입은 노예제의 찬성과 반대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고 제퍼슨은 임기 후 50여년 뒤에 남북전쟁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새 영토에 치르게 된다. 미국의 영토는 순식간에 두 배로 늘어났지만, 새 영토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 미시시피강과 콜로라도 강도 구별하지 못하던, 아무도 모르던 미지의 땅이었다. 제퍼슨은 루이스와 클라크를 보내 태평양까지 새 영토를 탐사하게 했다. 그들이 가져온 정보가 서부개척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04년 선거에서 제퍼슨은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임기 동안 제퍼슨은 날로 추락하는 인기와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앞선 사상은 기독교로부터도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정적인 애덤스 전 대통령이 임명한 연방 대법원장 마셜과의 갈등도 심각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 중 가장 큰 실책으로 지적되는 것은 1807년에 그가 서명한 출항금지법’(Embargo Act)였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는 동안 미국은 중립을 선포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미국이 적국에 수출을 한다며 툭하면 미국 상선을 나포, 물건을 빼앗고 심지어 선원을 납치하여 자기네 군대에서 싸우게 하는 등 피해가 심각했다. 이에 제퍼슨은 해외무역선에 대해 미국의 모든 항구를 폐쇄하는 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법으로 인해 미국 무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미국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제퍼슨에 대한 국민들의 원망은 높아져 인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1809, 인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몬티첼로에 있는 그의 자택으로 돌아갔고, 말년에는 버지니아대학을 설립하고 미국 철학협회 회장을 맡는 등 학술활동에 전념했다. 뒷날 미국인들은 제퍼슨의 업적을 기려 몬티첼로의 철인이라고 그를 칭송했다. 그는 인간평등을 주장하는 계몽사상가이자 시대에 앞선 사고를 하는 선각자였지만, 평생 200명이나 되는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주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민중에게 권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지녀, 결국 태어나면서부터 능력있는 소수 특권층이 지배해야 한다는 반민주적인 성향과 인디언을 박해했다는 부정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반연방주의자답게 그가 설계한 수도 워싱턴은 대학 캠퍼스 크기의 작은 것이었는데, 제국을 꿈꾸었던 워싱턴의 바람에 의해 웅장한 규모로 다시 설계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될 무렵 제퍼슨은 거의 20년간 아내 없는 독신으로, 영부인이 없는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192674, 제퍼슨은 존 애덤스와 같은 날, 미국 독립기념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사색하고 실천한 진취적인 인간의 대명사이다. 몬티첼로에 있는 그의 자택도 그가 손수 설계한 집이다.

 

미국 지폐 중 1976년에 첫 발행된 2달러의 앞면에 제퍼슨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2022년 3월 22일 화요일

미국 제2대 대통령 : 존 애덤스(John Adams)

미국 제2대 대통령 :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030~ 182674

 


  • 국가를 위해서 내 야망을 버린다!
  • 연방주의자.
  • 임기 : 1797 34~ 180133
  • 출생지 :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Braintree)
  • 부인 : 애비게일 스미스 애덤스(Abigail Smith Adams, 1744~1818)
  • 자녀 : 애비게일, 존 퀸시, 수재너, 찰스, 토머스
  • 부통령 : 토머스 제퍼슨(T. Jefferson)

 

워싱턴의 뒤를 이어 제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애덤스는 사실 대통령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현명함과 풍부한 지식은 미국을 창조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며 다혈질의 기질은 정치적인 적을 많이 만들어서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애덤스는 당대 그 어떤 인물보다도 깊고 폭넓은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지금의 퀸시 Quincy)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마치고 175823세의 나이에 이미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특히 영국의 법과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죽을 때까지 이 분야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애덤스의 과격하고 급진적인 성향은 6촌형인 새뮤얼 애덤스(1722~1803, 미국 독립운동가)에게 받은 영향이 크다. 1765년 인지조례법 반대투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고, 5년 뒤엔 놀랍게도 보스턴학살에 연관된 영국군 장교를 변호하기도 했다. 애덤스는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하는데 이때의 동지 제퍼슨은 뒷날 가장 큰 정적으로 변하여 그와 대립하게 된다.

 

그는 1780년 출신주인 매사추세츠주의 헌법 초안을 만들기도 했다. 독립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파리에서 영국과 독립협상을 벌이게 되었을 때 애덤스는 벤저민 크랠읔린, 존 제이와 함께 협상대표로 참가하여 1783년 미국 독립을 영국으로부터 승인받은 주역이었고, 1789년 미합중국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1797년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애덤스는 두 번째로 득표수가 많은 대통령 후보를 부통령으로 뽑던 당시의 제도에 의해 토머스 제퍼슨을 부통령으로 맞게 되었고, 제퍼슨은 임기 4년 동안 애덤스를 도와주기보다 끝까지 그의 정책에 반대하여 괴롭혔다. 그 이유는 제퍼슨이 철저한 반연방주의 세력의 중심지도자였고, 애덤스는 열렬한 연방주의자로 정치이념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자연 대통령과 부톨영 사이에 불화와 감정이 골이 깊어만 갈 수밖에 없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서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국, 프랑스와의 갈등이었다. 미국은 갓 태어난 보잘것없는 허약한 국가에 지나지 않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경쟁하는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미국을 무릎 꿇려 자신의 손아귀에 휘어잡으려고 으르렁대던 터였다. 특히 영국은 미국의 배드를 나포해 가고 미국 선원들을 영국군으로 강제 징용하는 등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거야.

 

애덤스는 영국과 전쟁상태에 있는 프랑스에 3명의 비밀특사에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XYX사건으로 알려진 밀사파견사건이었다. 밀사들이 파리에 가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자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은 거액의 뇌물을 요구했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해밀턴 등 친영 반프랑스의 연방주의자 세력은 프랑스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요구했고, 그들에게 등을 떠밀려 애덤스는 선전포고도 없이 프랑스와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크게 높아져, 프랑스 등 외국에 협조적인 자들을 벌줄 수 있는 외국인법에 애덤스는 서명하였다. 이 법은 선동을 방지하고 간첩, 배신 행위를 막는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들의 입과 귀를 틀어막는 아주 비민주적인 법이었다. 자연 프랑스에 우호적인 제퍼슨 등 반영방주의자들의 반발은 거세어졌고 연방주의자들과의 싸움도 더욱 거세어졌다. 별다른 명분도 실리도 없이 분풀이 같은 전쟁을 벌이던 애덤스는 결국 프랑스와 휴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친영파인 연방주의자들이 격분하여 애덤스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애덤스는 미국의 국익을 위하여 밀사를 보내고 프랑스와 휴전을 했지만 정적인 반연방주의자들(제퍼슨파)은 물론 동지인 연방주의자들(해밀턴파)에게도 버림을 받은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소신있는 외교와 국정은 적과 동지 모두의 외면을 받았고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신경질적이고 급한 성격은 임기가 끝날 때도 그대로 드러났는데 제퍼슨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임기 마지막날 밤에 제퍼슨에 반대하는 존 마셜을 연방 대법원장에 임명하고 정부 요직에 자기파 사람들을 대거 임명하여 심야내각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셜의 대법원장 임명은 결과적으로 사법부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권한에서 독립하여 의회, 정부, 법원이라는 3권의 분리에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존 애덤스는 고향인 브레인트리로 돌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간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오랜 동지이자 적이기도 했던 제퍼슨과 마지막에는 화해를 하게 되었다. 182674, 미국이 독립한 지 50년이 되는 독립기념일에 존 애덤스는 세상을 떠났다. 운명하기 직전 그는 토마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 있는데...”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제퍼슨은 그보다 몇 시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야망을 기꺼이 희생했던 존 애덤스. 그에게서 진정한 지도자의 평가란 정치적 실패와는 관련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같은 이름의 그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는 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내 미국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 되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