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드의 왕들
아카드 왕조는 이전의 다른 많은 왕조와 마찬가지로 수메르와 아카드에 대한 왕권을 가진 도시-군주들의 가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카드 왕조의 통치의 성격은 이전 왕조의 그것과 매우 다르며 그 당시까지 바빌로니아에 특징이던 도시 국가들의 경쟁 체제에 일시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바빌로니아의 정치적 중앙화와 바빌로니아의 영향이 근동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바빌로니아의 군대는 아카드 왕조 이전에 없던 체계적이고 긴 원정을 하였다.
아카드 왕조의 창시자인 사르곤은 평민 출신인 듯 하다. 키쉬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의도적으로 자신의 왕명을 ‘왕은 정당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샤루-킨’(Sharru-kin)으로 지었다. 그는 통치 센타를 아카드로 옮겼다. 아카드의 위치는 바빌로니아 북쪽(오늘날 바그다드 바로 아래쪽)에 위치했다.
아카드는 군사적 힘을 통해 패권을 얻었다. 우룩, 움마 그리고 몇몇 남부 도시들을 통치한 루갈자게시(Lugalzagesi)는 사르곤의 주적이었다. 도시 군주들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도시에서 아카드 왕을 위한 총독의 역할을 한다. 엔시라는 말이 초기 왕정시대에는 도시들을 다스리는 독립군주를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바빌로니아 전역에서 총독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시대의 아카드 왕들은 수많은 반란을 경험해야 했다.
중앙화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구되었다. 나람-신(Naram-Sin)의 통치 때는 중앙 통치를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몇몇 행정 단위에서 수량법의 표준화가 이루어진다.
- [연호]
아카드의 중앙 행정화를 보여주는 한 가지는 바빌로니아 전역에 통용되는 연수 계산 체계이다. 연호가 바빌로니아 전역에 채택되었다. 연호는 주로 군사 원정, 신전이나 도시 성벽의 건축과 보수, 운하의 건설, 남녀 대제사장의 임명, 제의(cultic) 물품의 봉헌과 관계된다. 제2천년기 후반에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났던 카시트 왕조 시절, 연호는 왕의 즉위년으로 해를 계수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첫 번째 해는 왕이 즉위한 후 첫 번째 새해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전 왕의 죽음과 그 날까지의 시기는 ‘즉위년’으로 표시되었다. 이 제도는 세레우코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새로운 수량법을 채택해야 했던 지방 서기관들은 새로운 언어에도 적응해야 했다. 아카드는 남쪽의 수메르어가 아닌 셈어를 사용했던 바빌로니아 북쪽 도시였다(아카드어). 아카드어는 문법적 요소를 나타내기 위해 보다 많은 유연성과 정확성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쐐기문자의 음저러 음가를 사용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메르어를 오랫동안 사용해 온 지방의 도시에서는 수메르어가 자주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다.
왕궁은 많은 경제적 자원을 보유하였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바빌로니아의 통일이 추구되었다. 사르곤은 종교적 제의의 전국 표준화를 꾀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자신의 딸을 우르에서 달의 신 난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신의 아내가 된다. 신의 아내가 된 그녀에게는 순수한 수메르어 이름이 주어졌다. 엔헤두안나(Enheduanna, 하늘에 합당한 여제사장). 우르의 난나(Nanna) 대제사장에 대한 통제가 곧 바빌로니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약 5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하였다. 우르에 대한 통치를 주장하는 왕은 누구나 자신의 딸을 그곳에 두고 신전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주었다.
사르곤과 나람-신의 군사적 업적. 나람-신이 자신의 아버지가 이미 정복한 지역을 다시 정복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원정이 ‘약탈’ 원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카드의 왕들은 서부 이란과 북부 시리아 지역에 군사적 힘을 쏟았다. 동쪽의 엘람, 파슘, 시무륨과 맞부딪쳤다.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을 통과하여 발릭 강(Balikh River)과 만나는 툿툴(Tuttul)까지 원정하였다. 툿툴은 다간(Dagan) 숭배의 중심지로 북서와 서부 시리아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당시까지 유력한 정치 중심지였던 마리와 에블라가 파괴되었다.
회계 문서는 더 멀리 떨어진 지역들도 언급한다. 아카드 왕들은 희귀한 물품, 단단한 돌, 나무, 은 등을 얻기 위해 먼 지역까지 원정한 것 같다. 원정의 목적은 무역로를 독점하려는 것이었다. 시리아에서 아카드인들은 기존의 도시에 거점 본부를 설치하였다. 나가르(Nagar, 오늘날의 텔 브락)에서는 나람-신의 이름이 찍힌 벽돌로 거대한 건물이 건설되었다. 니느바(Nineveh)에서는 마니슈투슈 왕이 이스타르 여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했다고 알려진다. 고대의 아카드 왕들은 아마 군사적 위협을 배경으로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는 지방 요충지들을 건립하였던 것 같다. 아카드와 멀리 떨어진 나라들은 결혼과 같은 외교적 수단을 통해 관계를 맺었다.
아카드 왕국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아카드 왕들의 자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사르곤 때부터 전통적인 칭호인 ‘키쉬의 왕’이 ‘세계의 왕’을 뜻하게 되었다. 나람-신은 ‘(우주의) 네 모서리의 왕’이라는 새 칭호를 도입했다. 이전 왕들은 죽은 후에 제사를 받았으나, 나람신은 살아있을 때 제사를 받았다.
바빌로니아 안에서뿐 아니라 다른 근동 지역에서도 아카드의 통치는 여러 가지 저항에 직면하였다. 아카드 왕국이 끝내 넘어진 이유 중의 하나도 바빌로니아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아카드 왕조는 반란을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나람-신은 바빌로니아 도시들의 두 연합군과 맞섰다. 북쪽 연합군은 키쉬의 왕인 이푸르-키쉬(Iphur-Kish)가 이끌었고, 남쪽 연합군은 우르의 왕인 아마르-기리드(Amar-Girid)가 이끌었다. 이푸르-키쉬는 키쉬, 쿠타(Kutha), 티와(Tiwa), 십파르(Sippar), 카잘루(Kazallu), 키리탑(Kiritab), 아피악(Apiak), 에레스(Eresh), 딜바트(Dilbat), 보르십파(Borsippa)와 같은 북쪽 도시들에서 보낸 군대를 지휘하였다. 아마르-기리드는 우룩, 우르, 라가스, 움마, 아답, 슈루팍, 이신, 닙푸르 그리고 페르시아 만 해안에 있는 마을의 군대를 진두 지휘하였다. 나람-신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후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람-신은 그가 반란 도시들의 신들에게 신의 지위를 부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카드 왕조도 아모리인들, 북시리아의 반유목민 그룹들은 늘 조심해야 했다. 아카드의 또 하나의 주적은 수사의 동쪽에 위치한 이란 국가 마르하시(Marhashi)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동쪽의 구티아라는 산족들(Gutians)이었다. 이들은 자그로스 산맥에서 살았던 것 같다. 샤르칼리샤리는 당시 구티아인들이 바빌로니아에 많이 정착하시 시작하여 아답에서는 구티아인 통역관을 임명해야 했다.
내부와 외부의 압력의 조합으로 샤르칼리샤리의 통치 기간 동안 아카드는 급격히 붕괴되어 갔다. 근동 전체가 다시 지방 독립국가들의 체제로 환원했으며, 그 중 일부는 전혀 새로운 민족에 의해 다스려졌다. 구티아인 지배자들은 아카드 왕조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에리두-피지르(Erridu-pizir)는 아카드 왕들을 흉내내어 닙푸르에 석비를 세웠고 ‘(우주의) 네 모서리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한 후 ‘구티움의 왕’이라는 칭호를 덧붙였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여 수메르의 왕명록은 ‘누가 왕이고, 누가 왕이 아닌가?’라고 탄식하고 있다.
북시리아에서는 후리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르케스와 나와르’(Urkesh and Nawar)라는 국가를 세웠다. 마리에서는 마니슈투수의 즉위 때에 ‘장군들의 왕조’(아카드어 샤카나쿠, Shakkanakku)가 이미 생겨났고 그 후 350년 동안 독립국가로서 도시를 다스린다. 수사는 아완(Awan)의 일부가 되었다. 아완이라는 국가는 이미 초기 왕정시대에 존재했고 그 영토는 중앙 자그로스로부터 수사의 남쪽 지역까지 이른다. 우르 제3시대의 초기에, 우르 왕들은 쿠틱-인슈쉬낙(Kutik-Inshushinak) 왕을 바빌로니아의 주적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그는 아완의 왕이었을 뿐 아니라 수사의 총독이자 장군이었다. 구데아 왕은 페르시아 만에 있던 마간과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아카드 왕조의 성립과 근동 전체에 대한 왕조의 영향은 근동 역사에서 중요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대중들의 상상 속에서 사르곤과 나람-신은 가장 위대한 왕들이었다. 이들은 강력한 군주의 모델이 되었고 거의 2천년 동안 만들어지고 전해진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랫동안 사르곤은 영웅적 전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제1천년기 중반에 이르면 사르곤의 교만을 비판하는 글들이 등장한다. 나람-신은 제3천년기 말에 이미 그의 오만함이 흠으로 언급되었다. 그가 니푸르에 있는 엔릴 신전을 파괴하였으며 그 때문에 벌을 받아 나라를 잃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