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의 제3왕조
아카드의 샤르칼리샤리 왕이 죽은 후 바빌로니아가 재통일되기 시작되는 시점은 약 40년 정도 간격이 있다. 우룩의 왕 우투-헤갈(Utu-hegal)은 그가 구티아인을 남바빌로니아에서 쫓아냈으며 왕권을 수메르인들에게 돌려주었다고 기록한다. 그의 형제, 우르-남마(Ur-Namma)는 그의 뒤를 이어 바빌로니아 전역에 우르를 수도로 한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그의 통치 말년에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구티아인을 처리하기 위한 군사 원정으로 서부 이란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아완의 쿠틱-인슈쉬낙과 충돌하게 되었다.
2100년경 우르-남마는 우르의 제3왕조를 시작했다. 같은 가문의 5명의 왕이 5세대를 이어 통치하게 된다. 약 70년동안 이 왕조는 세밀히 조직된 관료체제를 이용해 바빌로니아와 동쪽 주변 지역을 다스렸다. 우르 제3왕조는 슐기(Shulgi)의 통치를 시작으로 입비-신(Ibbi-Sin)가지 90여 년 동안 이어진다.
- 우투-헤갈(Utu-hegal, 2119~2113)
- 우르-남무(Ur-Nammu, 2112~2095)
- 슐기(Shulgi, 2094~2047)
- 아마르-신(Amar-Sin, 2046~2029)
- 슈-신(Shu-Sin, 2037~2029)
- 입비신(Ibbi-Sin, 2028-2004)
[우르 제3왕조의 왕들을 위한 찬양시]
우르 제3왕조와 함께 왕을 찬양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이 등장하였다. 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찬양시가 등장하였다. 우르의 제3시대의 왕 슐기(Shulgi)는 가장 많은 수의 찬양시를 헌정 받았다. 아마 48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통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르 왕조가 망한 후 얼마되지 않아 우르, 닙푸르 등 남부 도시들의 멸망을 노래하는 애가 몇 편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그 애가들은 이전 왕국의 소멸에 대한 아쉬움보다 큰 재앙을 극복하고 지역에 질서를 회복시킨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이 시대의 왕들은 아카드 시대의 왕들 만큼 후대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우르 제3왕조의 경제
슐기 왕은 국가 본토를 재정비하고 즉위 20년부터는 동족 주변 지역을 정복하였다. 슐기는 최소 9명의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각각은 중요한 지방 가문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중앙 행정의 일환으로 지방의 수입 중 상당한 부분을 거둬들이는 조세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 제도는 수메르어로 발라(bala)라고 불렀는게 그것은 ‘교환’을 의미한다.
우르 제3왕조 아래서 수메르와 아카드는 왕궁을 중심으로 한 경제 덕에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왕은 농경지를 확장시키는 관개 운하 건설을 종종 기념하였다. 이는 관개 운하 건설 사업을 위한 수많은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르 제3왕국은 주민들이 관료 조직에 철저히 종속된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노동력의 대가로 상당한 보상을 제공해야 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국가가 중앙재원에서 충당하였다.
우르 제3왕조 외부의 적
북쪽 경계는 슐기가 세운 벽으로 구획되었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가장 근접한 지역은 수-신(Shu-Sin)에 의해 요새화되었다. 성벽은 보통 아모리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슐기의 통치 말에는 우르가 남으로 수사에서 북으로 모술(Mosul) 평야까지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였다. 우르는 이 지역에 군사 정권을 심었다. 이로써 직접 착취가 가능했고 왕이 임의대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장군들(샤기나, Shagina)이 맡았다. 수많은 동물들이 닙푸르 근처의 푸즈리스-다간(Puszish-Dagan)으로 집결한다. 푸즈리스-다간은 동물들의 집결지로 슐기 왕이 즉위 38년에 세운 도시이다. 동쪽 변방은 본토의 경제에 편입되는 동물들의 공급지로 사용되었다.
동쪽 변방 너머의 땅은 적으로 간주되었고 자주 군사적 원정의 목표가 된다. 우르 제3왕조의 왕들은 이 적국을 달래기 위해 외교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실패한다. 쉬마스카와 같은 동쪽 국가들이 적대 태세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우르 제3왕조가 무너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르 제3왕조의 왕들은 북쪽과 서쪽 지방은 또 다르게 접근하였다. 이 지방의 국가들과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고 군사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르-남마는 마리의 공주와 자신의 아들 슐기와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이것은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위치한 그 나라가 더 북쪽 지역 사이의 완충 역할 혹은 중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정치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시리아인들은 아모리인들이었다. 아모리인들은 주로 반 유목민들로 바빌로니아의 기록에서는 나쁜 침략자로 그려진다. 아모리인들의 압력은 우르 제3왕조가 붕괴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군사적 대립을 택했던 아카드의 대시리아 정책은 우르 시대에는 외교를 골자로 한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왕들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나라를 통일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자녀들을 주요 신전의 대제사장 혹은 대여사제로 임명하였고 왕국 전역의 신전들을 복원하거나 건설하였다. 즉위 20년이 되기 전 슐기는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였고 그의 후계자들도 왕이 됨과 동시에 신의 지위를 가졌다. 종교의식을 통한 중앙화를 꾀하였다. 비록 사람들이 우르에 있는 왕에게 세금을 바치고 경의를 표해야 했지만 지역 경제와 위계 질서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우르의 패권 종식
우르의 패권은 갑자기 종식되었다. 입비-신(Ibbi-sin)의 통치 초기에 일부 지방은 납세를 중지했고 즉위 9년째 되던 해에는 발라 제도 자체가 사라졌다. 서기관들은 입비-신 즉위 2년 말이 되면 더 이상 푸즈리스-다간에서 우르 제3왕조의 연호로 문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입비-신 즉위 8년에는 이신에서 독립 왕조가 왕권을 잡았다. 입비-신을 섬기던 장군 중 하나인 이스비-에라(Ishbi-Erra)가 그 왕조를 이끌었다.
외부적 요소. 서부에서 공격해온 아모리인들과 동쪽에서 밀고 온 엘람인들이 언급된다. 아모리아인들은 북시리아 출신의 반 유목민들이고, 바빌로니아 문학에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슈-신(Shu-Sin)이 북쪽 성벽을 강화하고 그것을 ‘아모리인들을 막는 성벽’이라고 이름지었다. 이스비 에라도 곡물을 우르에 보낼 수 없다고 아모리인들 핑계를 댄다. 아모리인들과 구티아인(아카드 왕국 말기)은 모두 외지인들이고 바빌로니아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되었고 또한 기존의 정치 체제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르에 대한 마지막 공격은 동쪽에서 왔다. 동쪽에서 우르의 주적이었던 쉬마스키의 군주는 우르의 힘이 약해졌을 때 엘람과 그 주변 지역을 접수하였다. 입비-신의 통치 말 그는 바빌로니아로 원전해 공격하였다. 우르의 수도가 함락되고 입비-신 왕도 수사로 포로로 끌려갔다. 그 도시는 이신의 이스비-에라가 엘람인들을 축출하기까지 약 7년 동안 엘람인들의 통치를 받았다. 이스비-에라와 그의 후계자들은 우르의 왕의 후손들임을 자처하였으나 우르와 동일한 지리적 범위를 통치할 수는 없었다. 점점 더 많은 독립 도시국가들이 바빌로니아 전역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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