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와 동쪽 지역
교통 거점의 앗수르
제2천년기 초기에 아시리아에서 발견된 문서는 놀랍게도 앗수르 출신의 상인들이 행한 국제 무역을 자세히 증거한다. 이로써 당시에 앗수르가 이 무역에서 교통거점으로 독점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카네스 무역은 고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아나톨리아에서 주석은 앗수르 가격의 거의 두 배가 된다. 직물의 가격은 3배가 되었다. 상인은 일년에 쉽게 50~100%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이 위험도가 높은 사업에 대한 대가였다. 앗수르는 이웃 국가들보다 그다지 힘이 세지 못했다. 그러나 무역 조건을 협상하는 능력이 있었다.
에스눈나의 성장과 멸망
앗수르의 남동쪽에 있는 가장 힘센 두 국가는 엘람 그리고 디얄라 지방의 에스눈나(Eshnunna)다. 에스눈나(오늘날의 텔 아스마르)는 입비-신의 통치 초기에 우르로부터 독립하였다. 첫 번째 독립 군주인 슈-일리야(Shu-ilija) 이후 나라의 왕들은 100년 이상 동안 ‘티슈팍 신의 총독’으로 불렸다. 앗수르에서 지방의 독립 군주들은 ‘앗수르 신의 총독’이 되었다. 에스눈나가 왕이란 칭호를 얻었던 것은 이신이 닙푸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픽-아닷의 아들들인 나람-신과 다두샤(dadusha)는 자신의 팽창주의적 정책을 계속 진행했고 그것은 에스눈나를 18세기 초엽의 메소포타미아 특유의 분쟁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했고, 에스눈나는 그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군가가 되었다.
- 우르게딘나(Urguedinna) - 우르 제3왕조 슐기 치하의 총독
- 칼라무(Kallamu) - 우르 제3왕조 슐기 치하의 총독
- 이투리아(Ituria) - 우르 제3왕조 슈-신 치하의 총독
- 일루슈일리아(Ilushuilia) - 우르 제3왕조 입비신 치하의 총독
- 누라쿰(Nurakhum) - 우르 제3왕조 입비-신, 이스비-에라의 경쟁자
- 키리키리(Kirikiri)
- 빌랄라마(Bilalama) - 엘람의 탄-루후라티르(Tan-Ruhuratir)의 경쟁자
- 이샤라마슈(Isharramashu)
- 우스라와스(Usurawasu)
- 우르-닌마르(Ur-Ninmar)
- 우르-닌지다(Ur-Ningizzida)
- 이픽-아다드 1세(Ipiq-Adad I) - 바빌론의 수무-아붐의 경쟁자
- 사리아(Sarriia)
- 와라사(Warassa)
- 벨라쿰(Belakum)
- 이발-피-엘 1세(Ibal-pi-El I)
- 이픽-아다드 2세(Ipiq-Adad II)
- 나람-신(Naram-Sin) - 이픽 아다드 2세의 아들, 삼시 아닷 1세의 경쟁자
- 단눔-타하즈(Dannum-tahaz)
- 다두샤(Dadusha) - 이픽 아다드 2세의 아들, 삼시 아닷 1세의 경쟁자
- 이발-피-엘 2세(Ibal-pi-El II) - 마리의 짐리 림의 경쟁자
- 실리-신(Silli-Sin) - 엘람에 의해 왕으로 세워짐
북쪽으로는 어린 삼시-아닷(Sahmshi-Adad)이 다스리는 에칼라툼과 정치적으로 약하지만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앗수르와 같은 국가들이 있었다. 나람-신(Naram-Sin)은 그 둘을 정복했고 삼시-아닷을 유배보냈다. 7년 후 나람-신이 죽자 마자 삼시-아닷은 에칼라툼을 다시 통제하게 되었고 다두샤는 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1781년 그 두 왕은 연합하여 두 자브강 사이의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 원정은 다두샤의 승리 비석에 새겨졌다. 그 비석은 다두샤가 그 땅들을 삼시-아닷에게 주었다고 기록한다. 그 후 삼시-아닷은 그와 연합한 왕을 배반하여 에스눈나 도시들의 일부(샤두품, 네레브툼)를 장악하였다. 삼시-아닷이 죽자 상황이 역전되어 에스눈나가 앗수르에 가까운 일부 도시들을 함락하였다.
에스눈나는 유프라테스 협곡에 들어가고 마리에까지 이른다. 삼시-아닷의 아들인 야스마-앗두(Yashmah-Addu)가 그곳을 다스렸을 때 에스눈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마리에 짐리-림(Zimri-Lim)이라는 새 왕이 세워지자 에스눈나의 이발-피엘 2세가 동맹을 결성하려 했지만 짐리-림이 거절했다.
마리와 에스눈나의 전쟁으로 마리는 에스눈나의 평화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3년 후 엘람의 지도자는 에스눈나에 의해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직선로를 잃게 되자 바빌론, 마리, 라르사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1776년에 에스눈나를 약탈했다. 이에 엘람은 꼭두각시 왕을 지명하였고, 곧 실리-신(Silli-sin)이라 이름하는 에스눈나 토착 왕을 새롭게 세웠다. 그는 바빌론의 함무라비가 엘람 국가를 약탈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1762년에 함무라비는 에스눈나를 침탈함으로써 자신의 전 동맹 왕을 배반했다. 함무라비는 그 지역을 영토에 통합하지 않았지만 에스눈나에 강한 왕이 생기지 못하게 하였다.
엘람의 성장과 멸망
엘람은 수사를 둘러싼 저지대와 안샨(오늘날의 탈-이 말얀) 주변의 자그로스 고원지대를 포함한다. 엘람이 우르에서 독립한 직후 엘람은 전 주인 우르를 배반하고 무력으로 수도를 함락하고 왕을 포로로 삼음으로써 우르의 멸망에 일조했다. 이신의 군대는 그후 엘람군의 우르 주둔을 종식시켰고 후에 엘람이 바빌로니아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막았다. 라르사의 몇몇 왕들은 엘람 도시를 정복했고 엘람은 바빌로니아의 지역 전쟁에서 우룩, 이신 등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라르사의 마지막 두 군주, 즉 와랏-신과 림-신이 엘람 계통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심티-실학(Simti-Shilhak)의 아들은 쿠두르-마북의 아들들이었다. 심티-실학이나 쿠두르 마북은 모두 티그리스 동쪽 지역의 부족 지도자들로 19세기에 바빌로니아이 일부 도시들을 장악하였다.
[수칼마 왕조(Sukkalmah Dynasty)]
- 에파르티 2세(Eparti II) : 1973년경
- 실하하(Shilhaha)
- 쿡-나슈르 1세(Kuk-Nashur I)
- 아타-후슈(Atta-hushu) :
- 테텝-마다(Tetep-Mada) : 1890년경 이후
- 팔라-이쉬샨(Palar-Ishshan)
- 쿡-산닛(Kuk-Sanit)
- 쿡-키르와시(Kuk-Kirwash)
- 템-사니트(Tem-Sanit)
- 쿡-나훈테(Kuk-Nahhunte )
- 쿡-나슈르 2세(Kuk-Nashur II)
- 시룩두(Shirukduh) : 1790년경, 아시리아의 삼시아닷 1세의 경쟁자
- 시무트-와르타쉬 1세(Shimut-Wartash I)
- 시웨-팔라-후팍(Siwe-Palar-Hupak) : 1765년경, 함무라비 시대
- 쿠두줄루쉬 1세(Kuduzulush I)
- 쿠티르-나훈테 1세(Kutir-Nahhunte I)
- 아타-메라-할키(Atta-Merra-Halki)
- 타타 1세(Tata II)
- 릴라-이르타쉬(Lila-Irtash)
- 템티-아군(Temti-Agun)
- 쿠티르-실하하(Kutir-Shilhaha)
- 쿡-나슈르 3세(Kuk-Nashur III)
- 템티-랍타쉬(Temti-Raptash)
- 시무트-와타쉬 2세(Shimut-Wartash II)
- 셔투(Shirtuh)
- 쿠두줄루쉬 2세(Kuduzulush II)
- 탄-울리(Tan-Uli)
- 템티-할키(Temti-Halki)
- 쿡-나슈르 4세(Kuk-Nashur IV)
- 쿠틱-마랏(Kutik-Matlat)
엘람의 성공에 기여한 것은 엘람이 카룸-카네스가 없어진 후 서부로 가는 이란이 주석을 통제했다는 사실이다. 청동 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 요소는 엘람에서 마리를 경유하여 지중해에 이르렀다. 엘람은 페르시아 만에 있는 딜문(Dilmun)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엘람은 다른 외국 물품과 무역로도 독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가 마리와 알레포와 반-엘람 동맹을 결성하였다. 함무라비 즉위 9년째인 1764년 엘람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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