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천년기 후반, 고대 근동의 정치 상황
1. 강대국들의 등장
1,500년부터 1,200년까지의 300여년간 근동에서는 강대국들이 많이 등장하여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주요 강대국들로는 바빌로니아의 카시트 왕국,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제국, 이집트 그리고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서는 처음에는 미타니 그리고 나중 14세기 중엽부터는 아시리아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동쪽에는 엘람이라는 강력한 왕국이, 서쪽으로는 미케네 왕국이 위치하였으며 중간에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소왕국들이 있었다.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연대 설정의 문제이다.
제2천년기 후반의 강대국들의 비교 연대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미타니 | 바빌로니아 | 아시리아 | 하티 | 이집트 |
1500 | 파랏타르나 | | | | 아멘호텝 1세 |
1450 | | | | | 투트모세 3세 |
1400 | 아르타타마 1세 | | | | |
| | 카다스만-엔릴 1세 | | | 아멘호텝 3세 |
1350 | 투스라타 | | 아수르-우발릿 1세 | | 아케나텐 |
| | 부르나부리아스 2세 | | | |
| 샤티와자 | | | 숩필룰리우마 1세 | |
| | 쿠리갈주 2세 | | | |
| | | | 무르실리 2세 | |
1300 | | | 아닷-니라리 1세 | | |
| | | | 무와탈리 2세 | |
| 엘람 | | | | |
| | 카디스만-엔릴 2세 | 살마네저 1세 | | 람세스 2세 |
1250 | 운타스-나피리샤 | | | 하투실리 3세 | |
1200 | | 카스틸리아슈 4세 | 투쿨티-니누르타 1세 | 툿할리야 4세 | |
| | | | 숩필룰리우마 2세 | 메르넵타 |
| 슈스룩 나훈테 | | | | |
1150 | 쿠티르-나훈테 | | | | 람세스 3세 |
| 실학-인슈쉬낙 | | | | |
| | | 앗수르-레샤-이시 1세 | | |
| | 네부카드네자르 1세 | | | |
1100 | | | 티글라스-필레저 1세 | | |
1050 | | | | | |
2. 정치 체제 : 이집트, 미타니, 하티
17세기 이래 이집트는 많은 소왕국으로 분열되었었고, ‘힉소스’로 불리는 외국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지만 이 당시 외국의 영토까지 확장하여 오늘날 수단 지역인 누비아에서 북시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제2천년기 초반의 북부 시리아는 정치적으로 카트나, 얌캇, 툿툴, 아품 등의 도시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 모든 지역들이 16세기에 쇠퇴를 겪었고 미타니가 15세기에 일어났을 때 그 지역 전체를 통일하고 영토 국가가 되었다. 신생국가 하티(Hatti)도 중앙 아나톨리아와 북서 시리아의 정치적 통합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서로 경쟁적인 영토 국가들 사이에 끼여있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은 강대국들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였다. 강대국들은 그 지역에서 직접 전투하거나 대리전을 하였다. 그들은 강대국의 종주왕들과 구분되는 별개의 정치체제로 계속 존재했었는데, 강대국들은 그들끼리 통일하는 것도 방해하였다.
3. 외교와 무역
모든 국가는 당시 외교적 국제어였던 바빌로니아어에 능통한 서기관들이 일하는 문서를 설치하였다.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14세기 이집트의 아케나텐 왕이 수도를 아케타텐(오늘날의 아마르나)로 옮겨진 곳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서신이다.
아마르나 서신을 살펴보면, 당시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거대한 가족인 것처럼 묘사했다. 동등한 힘의 왕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고 속국 왕들은 종으로 불렸다. 아마르나 시대에는 강대국 왕들이 정치 문제를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 문제를 암시하는 부분은 등장하지만 이 사람들은 주로 사신과, 선물, 여인들의 외교적 교환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속국 왕들의 편지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가 간의 관계는 성문화되어야 했다. 특히 종주국과 종속국 사이의 관계는 왕들 사이의 조약을 통해서 성립되었다. 조약 문서에는 동등한 힘의 국가 사이의 조약(하티의 하투실리 3세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사이의 1259년 조약)과 종주국과 종속국 사이의 조약이 있다.
정략결혼은 국가 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이집트의 왕들은 외국 여자를 궁에 데려오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절대로 자신의 공주를 외국인 왕에게 시집보내지 않았다. 다른 나라 왕들은 이런 이집트의 태도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지만 자신의 딸들을 이집트로 시집보내면서 그 대가로 이집트가 독점했던 금을 받았다.
결혼은 국가의 내부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바빌로니아의 왕 부르나부리아스 2세(즉위 1359~33년)는 아시리아의 왕 앗수르-우발릿 1세(즉위 1363~28년)의 딸인 무발리탓-세루아(Muballitat-Sherua)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라-하르다스(Kara-hardash)가 바빌로니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로 살해되었을 때, 앗수르-우발릿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반란 왕을 퇴위시키고 쿠리갈주 2세(Kurogalzu II)를 대신 왕위에 앉혔다.
과부가 된 이집트의 여왕(아마도 투탄카문의 젊은 아내였을 것임)에 관한 이야기는 외국 왕의 후손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잘 드러내 준다. 그 이집트 여왕은 히타이트 왕 숩필룰리우마(Suppiluliuma)에게 자신의 남편감으로 아들 중 하나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편지를 받은 숩필룰이우마는 처음에는 저의를 의심했으나, 여왕의 진의를 파악한 그는 아들 중 하나를 하티에서 이집트로 보내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가던 도중에 살해된다. 이집트 궁에 있는 사람들 중 하티와 이집트가 연합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곧 자신의 사람을 왕위에 올렸다.
강대국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선물의 교환이다. 선물의 교환은 이 강대국 사이의 결속이 유지된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왕들은 선물의 교환을 통해 자국에서 구할 수 없는 사치품을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상호 존중, 명예, 형제애의 제도를 강화시켰다. 중요한 원칙은 상호 평등성이다. 선물 교환 제도를 통해 높은 수요의 귀중품들이 근동 전역으로 유통되었다. 왕실 간의 선물 교환은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사치 품목이 주를 이루었다. 그것은 근동 전역으로 자원과 제조 물건을 유통시키는 광범위한 무역 구조의 작은 일부분이었다.
무역 체계에서 무역 거점지의 역할을 한 장소는 우가릿이다. 우가릿은 자신만의 왕조를 가졌지만 처음에는 이집트, 나중에는 하티의 속국이 되었다. 이 시대의 무역과 외교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4. 지역 경쟁 : 전쟁
아시리아에서 군사 원정을 자세히 기록하는 관습은 1300년경에야 시작되었고 바빌로니아에서는 언제나 전쟁이 건축 업적에 가려 주의를 끌지 못했다. 전쟁은 한 강대국이 다른 강대국의 속국을 침입하거나 강대국들이 직접 대결하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이집트와 미타니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놓고 경쟁하였다. 1340년 이후에는 이집트와 하티가 그 지역을 놓고 경쟁하였다. 이집트는 1400년이 되면 우가릿까지 통치 영역을 확장하였다. 1300년이 되면 히타이트는 카데스까지 자신의 속국들을 확장하였다. 이때 우가릿과 같은 나라도 히타이트의 완전한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처음에 북시리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미타니는 숩필룰리우마 1세(1344~1322)가 이끄는 히타이트에 의해 영토가 크게 축소되었으나 국가는 존립을 유지하였다. 13세기 초에 히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에 속국을 통한 대리전 구도가 깨지고 그들 군대의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가장 유명한 것이 1274년에 일어난 카데스 전투다. 이집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후에 람세스는 이집트 통제 지역을 남부 팔레스타인으로 제한하였다. 국지전의 양상을 띤 이 진쟁은 그 지역의 특징적 체제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다양한 국가들 사이의 힘의 관계를 재조정하려는 것 같다. 13세기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이 국제 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경쟁의 규칙들과 전쟁의 목적이 변화한다.
이집트는 중앙에서 통제하는 상비군을 창설했으며 상비군에 속한 군인은 평생 직업 군인으로서 국가 정책에 관여하였다. 미타니도 전차병들로 구성된 귀족이 다스렸다고 여겨진다. 군국주의는 당시의 시대 정신이었다.
5. 공동 이념과 사회 조직
당시 근동 국가들의 왕들은 그들 사회 내부의 사회 구조와 그곳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역할에 대한 이념도 공유하였다. 정치 조직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그들 모두에는 소수 엘리트들과 대다수 대중 사이에 재물과 권력의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국제적 엘리트 계급도 등장했다. 이 시대 근동의 어느 지역에서나 대규모 건축 사업과 예술 활동을 볼 수 있었다. 이 시대는 고대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들을 생산한 시대이다.
이 시대 근동의 공통된 특징은 이 공공 건물들이 도시 안에서 명확하게 구별되고 관리되는 지역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도시 전체가 왕의 주거 기능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도시(엘람의 알-우타스-나피리샤, 바빌로니아의 두르-쿠리갈주, 아시리아의 카르-투쿨티-니누르다, 이집트의 페르-람메스와 아케타텐 등)가 건설되었다. 백성들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왕의 거처였다. 그들을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은 왕이 가진 부를 증명해준다. 심리적으로 그 도시는 지배 엘리트들을 백성으로부터 구분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이 도시에서 새로운 관료 계층, 즉 사회적 지위가 가족 관계보다 왕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계층이 창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 가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아케타텐은 그 도시를 건설한 왕이 죽자 곧 버려졌다. 나머지 도시들도 중요성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도시들, 궁전들, 신전들은 모두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왕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들이나 방문객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경쟁했던 것 같다. 18세기 유럽 엘리트들이 불어로만 대화했던 것처럼 주전 14세기의 고대 근동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바빌로니아어 실력을 뽐냈을 것이다. 그들이 특별히 바빌로니아어에 능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군사 엘리트들은 궁내의 서열의 최상위를 차지했다. 사회에서 전차를 모는 군인은 매우 높게 평가되었고 높은 봉급도 수령했다. 당시 국제 조약에서 범죄자들의 송환 규정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들은 노동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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