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천년기 후반의 서부 국가들 : 미타니
미타니의 토속 이름은 마이타나(Maittani)였으나 후대에 팔리세트인과 히타이트 지방의 문서에서 미타니(Mittani)라는 이름이 발견되었다. 동시에 미타니 문서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하티에서 발견된 문서에서는 하니갈밧(Hanigalbat)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히타이트 문서에서 ‘후리안 사람들의 땅’으로 지칭되었다. 반면에 이집트인들은 나리나(Nahrina)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용어의 다양성은 국가(미타니, 하니갈밧), 주민들의 인종(후리안 사람들), 지리적 환경(나리나)에 따른 것이다.
미타니의 중심은 유프라테스강이 굽어지는 지역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북시리아 지역이었다. 전성기 때에 미타니는 티그리스강 동쪽 지역, 아나톨리아의 남부 해안을 영토로 편입하였다. 남쪽으로는 유프라테스 중류 계곡을 따라 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빌로니아와 직접 국경을 접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타니의 수도는 와슈칸니(Washukanni)로 하부르강의 수원에 이르는 북시리아 근처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타니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이집트의 18왕조의 기록에서다. 18세기의 북시리아는 수많은 후리안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왕국들로 형성되었다. 15세기 초가 되면 미타니 왕은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된다. 히타이트가 알레포를 멸망시킴으로서 생긴 힘의 공백이 미타니와 같은 새로운 국가가 발전하도록 도왔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15세기 전반부까지 미타니 왕 파랏타르나는 종주왕으로 서쪽 지역의 키주와트나, 동쪽의 누지, 남쪽의 테르카를 포함한 지역을 제어했다. 그의 나라는 서부 아시아에서 가장 힘이 셌으며 15세기 초반의 이집트 확장 정책의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남서 아나톨리아의 알라락에서 발견된 자서전적 비문 : 이드리미(Idrimi)가 고향인 알라락을 떠나 유프라테스강가에 위치한 에마르로 도망해야 했다. 그곳에서 종으로 불행한 삶을 산 이드리미는 에마르를 떠나 이번에는 가나안의 외지에서 방랑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하비루(habiru) 전사들의 우두머리, 즉 사회에서 소외된 반 유목민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들의 힘을 배경으로 이드미리는 알라락과 그 주변 지역을 탈환한다. 그때 그는미타니 왕인 파랏타르나를 만나게 되는데 파랏타르나는 알라락에 대한 이드미리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를 자신의 속국 왕으로 삼았다.
북시리아에 대한 미타니의 패권은 14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북시리아에 주기적으로 원정했던 제18왕조의 이집트 왕들은 미타니를 무서운 적으로 언급한다. 아멘호텝 2세(1426~1400)부터 반전하여 이집트는 미타니와 당시 미타니왕 사우스타타르(Saustatar)를 동맹국으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 후 1365~1335년 동안 미타니는 수많은 내부적 외부적 환란에 부딪친다. 내부적으로는 두 왕족 계파가 왕위를 놓고 경쟁하였고 각 계파는 자신의 정당성을 외국의 황실로부터 인정받으려 하였다. 이집트 왕 아멘호텝 3세(1390~1353)와 편지로 왕래한 투스라타(Tushratta)가 그의 형이 죽음으로써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 이집트는 이런 상황을 불쾌히 여겼다. 투스라타가 그의 형의 살인자를 처형한 후에야 이집트는 미나티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였다. 투스라타의 재위 기간에 또 하나의 형제인 아르타타마(Artatama)가 히타이트의 지지를 등에 업고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후대의 히타이트 조약 문서는 그 지역에 두 개의 미타니 왕국의 존재를 묘사한다. 아르타타마의 아들인 슈타르나 3세는 투스라타를 죽인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국가 동맹을 하티로부터 새롭게 떠오르는 아시리아로 옮겼다. 이것은 히타이트 왕 숩필룰리우마의 진노를 촉발시켰고 숩필룰리우마는 수년 동안 마티니의 땅을 침공하고 대부분의 서부 시리아 속국들을 빼앗았다. 히타이트는 투스라타의 아들인 킬리-테숩(Kili-Thshub)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숩필룰리우마는 킬리-테숩을 샤티와자(Shattiwaza)의 통치 아래 있던 미타니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1365-1335년 동안 미타니는 지역의 패권국에서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아시리아인들은 숩필룰리우마가 죽자 히타이트가 약해진 틈을 타 미타니에 압력을 가했다. 미타니의 핵심 지역이 아닷-니라리 1세와 살마네저(Shalmaneser) 1세의 지도 아래 조금씩 아시리아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아시리아인들은 미타니의 저항을 진압하고 유프라테스강의 서쪽 둑까지 이르는 미타니 영토 전역에 행정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대왕 투쿨티-니누르타(재위 1243~1207)가 죽은 시점은 1200년경에 근동 서부 지역을 강타했던 대혼란과 일치했다. 미타니 지역에 국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바로 이 현상과 관련있는 듯하다.
미타니의 초기 역사, 즉 15세기에 알라락과 누지는 토속 왕조가 다스렸으며 그 왕들은 미타니 왕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미타니는 비에 의존하여 농사짓는 지역이었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미타니를 ‘후리안 사람들의 땅’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미타니의 공식 언어 중 하나는 후리안어였다. 후리안어로 된 문서가 희귀한 것은 아마 미타니의 수도인 와슈칸니가 발굴은커녕 아직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타니의 지배자들
- 키르타, 재위 기원전 1500~기원전 1490
- 슈타르나 1세, 키르타의 아들 재위 기원전 1490~기원전 1470
- 바라타르나, 재위 기원전 1470~기원전 1450
- 파샤타타르, 재위 기원전 1450~기원전 1440
- 사우슈타타르, 파샤타타르의 아들 재위 기원전 1440~기원전 1410
- 아르타마마 1세, 재위 기원전 1410~기원전 1400
- 슈타르나 2세, 재위 기원전 1400~기원전 1380
- 아르타슈마라, 재위 기원전 1385~기원전 1380
- 투슈라타, 재위 기원전 1380~기원전 1350
- 아르타마마 2세
- 슈타르나 3세,찬탈자 아르타마마 2세의 아들, 재위 기원전 1350
- 사티와자(마티바자) 투쉬라타의 아들, 재위 기원전 1350~기원전 1320
- 샤투아라 1세, 재위 기원전 1320~기원전 1300
- 와사샤타, 샤투아라의 아들 재위 1300~1280
- 샤투아라 2세, 재위 1280~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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