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의 바빌론
바빌론은 고대 아카드 시대부터 수백 년 동안 존재해왔다. 함무라비 선왕들은 조금씩 십파르, 키쉬, 딜밧, 마랏과 같은 북쪽 도시의 독립국가들을 병합하여 영토 국가를 이뤄가고 있었다.
- 수무-아붐(Sumu-abum, 1894~1881경)
- 수무-라-엘(Sumu-la-El, 1880~1845경)
- 사비움(Sabium , 1844~1831경)
- 아필-신(Apil-Sin, 1830~1813경)
- 신-무발릿(Sin-Muballit, 1812~1793경)
- 함무라비(Hammurabi, 1792~1750경)
- 삼수-일루나(Samsu-iluna, 1749~1712경)
- 아비-에슈(Abi-Eshuh, 1711~1684경)
- 암미-디타나(Ammi-Ditana, 1683, 1647경)
- 암미-사두카(Ammi-Saduqa, 1646~1626경)
- 삼수-디타나(Samsu-Ditana, 1625~1595경)
함무라비가 1792년에 왕이 되었을 때 국제 정세는 남쪽에서는 림-신이 남부 바빌로니아 전지역을 다스렸고 북쪽에서는 삼시-아닷이 득세하였다. 초반기 함무라비는 주로 국가 내부의 발전에 관심을 쏟은 것 같다. 마리에서 발견된 외교 편지는 함무라비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에는 외교로 접근했지만 후에는 무력을 사용한다고 전하고 있다. 1776년에서 1761년의 단 5년만에 함무라비는 삼시-아닷이 죽고, 림-신이 늙자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라르사와 마리 이북의 중부 유프라테스 지역은 바빌로니아 국가에 병합되었고, 에스눈나의 왕은 제거되었으며, 엘람의 왕들은 더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유일하게 정복되지 않은 지역은 바빌로니아 북부다. 함무라비는 그 후 일 년에 두 번씩 그 북부 지역에 군사적 원정을 감행했으나 그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다. 함무라비는 자신을 ‘지구의 네 모서리를 순종하게 만든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는 법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고 의로운 통치를 하는 목자이다. 나의 은혜의 그늘은 내 도시 위에 덮였다. 나는 수메르와 아카드 땅들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내 무릎 위에 품었다.”
그것은 법문이 아니라, 함무라비를 모범적인 정의의 왕으로 묘사하는 비문이다. 재판 사례의 기록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법전 문서들이 함무라비 법전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함무라비 법전은 법문의 나열한 문서라기보다 함무라비가 자신의 땅에서 정의를 행하는 왕임을 생생한 예들로 증거하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통치 말에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바빌로니아는 한물간 강대국들은 엘람, 에스눈나, 앗수르에 둘러싸인 유일의 강대국이었다. 서부 시리아에서만 얌캇과 같은 국가와 그의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바빌로니아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 불과 십 년, 그의 아들인 삼수일루나(Samsuiluna)는 남쪽의 큰 반란을 맞았다. 그것은 라르사의 마지막 왕이 죽은 후 자신을 림-신이라고 부르는 자가 일으켰다. 삼수일루나는 반란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지역에 대한 통제력은 점점 약해졌다. 삼수일루나의 즉위 13년 되던 해, 닙푸르와 다른 중부 바빌로니아의 도시들은 더는 바빌론의 통치 아래 있지 않았다. 고고학 증거에 따르면 우르와 닙푸르와 같은 과거의 큰 도시들은 대개 이 시대에 버려졌다. 반란에 대한 바빌론의 대처가 너무 철저해서 남부의 도시 사회의 간접 자본 시설들이 회복할 수 없게 파괴되었던 것 같다.
함무라비 이후의 바빌로니아
북부 바빌로니아는 계속해서 번성했다. 함무라비의 다섯 후손들은 155년 동안 분쟁없이 통치하였다. 삼수일루나는 유프라테스강의 깊은 내지까지 원정하여 테르카 주변의 신생국 하나(Hana)를 공격, 병합하고 하부르 북부 지역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한 곳에서는 반대 세력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카시트인들(Kassites)이 바빌론의 군사 활동의 목표가 되었다. 16세기가 되면 그들이 바빌론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왕에 대한 찬양은 우르 제3왕조시기에 발전되었는데, 제2천년기 초기의 국가들도 이 전통을 계승하였다. 왕을 초인적으로 그림으로써 그것들은 왕을 신으로 간주하는 이념을 강화시켰다. 제2천년기 초기의 왕들에게 헌정된 찬양시들은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을 수메르어를 사용해 정교한 문서를 작성한 일부 서기관들의 능력을 보여준다. 북부 바빌로니아에서도 수메르 문학이 연구되었다. 왕은 서기관들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바빌로니아는 고대 세계에서 과학이 발달한 문명으로 유명하다. 이 시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방대한 과학 문서, 특히 수학 문서들을 보게 된다.
바빌론의 정치적 중요성은 그 지역의 종교적 초점을 그 도시로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함무라비와 삼수일루나는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을 선호하였다. 마르둑은 최남단 도시인 에리두(Eridu)의 수호신인 에아(Ea)의 아들이 됨으로써 닙푸르의 수메르 만신전에 들어가게 된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조를 거치면서 제2천년기 후반의 근동의 특징짓는 많은 문화 요소들이 발전했으며 바빌로니아의 문화적 중심이 그때부터 북쪽으로 영구히 이동하게 된다.
1595년 히타이트의 무르실리(Mursili) 왕은 북시리아를 원정한 후 군대를 이끌고 별다른 저항 없이 유프라테스강으로 남하하였다. 그때 바빌론을 함락하고 고대 바빌론을 멸망시킨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