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히타이트 왕국
고대 히타이트 왕국 이전의 역사
아나톨리아에서는 고대 히타이트 제국이 등장하기 전에는 어떤 문서 자료도 없었다. 히타이트에 대한 지식은 주로 그 지역에서 활동한 아시라아 상인들의 식민지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이 지역의 언어들은 하티어(Hattic), 루위안어(Luwian), 팔라익어(Palaic), 후리안어(Hurrian) 그리고 히타이트어(Hittite)로 알려진다. 지방에서는 히타이트어를 네사(Nesa)의 언어라는 의미에서 네실리(Nesili)라고 불렀다. 네사는 아시리아 상인들의 식민지가 있었던 카네스의 토착 이름이었다. 제2천년기에 아나톨리아에서 사용된 언어들 중 몇몇은 인도-유럽어였다.
히타이트어가 네사, 즉 카네스의 언어로 간주되는 사실은 고대 아시리아 식민지 시대와 후의 히타이트 역사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니타 문서’는 쿠사라(Kussara)라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도시의 왕들이었던 아니타와 그의 아버지 피트카나(Pitkhana)가 네사를 포함한 중앙 아나톨리아 도시들을 정복하였다고 기록한다. 이때 네사는 그들의 왕국의 수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키질 이르막(the Kizil Irmak)강 전역과 흑해에 이르는 지역을 통일하였다. 이런 군사 작전으로 말미암아 아시리아와 무역 네트워크가 무너졌던 것 같다. 아니타의 죽음과 함게 아니타 왕국이 무너졌지만 후대의 기록에서 그가 기억된다는 것은 그가 후대의 히타이트 왕가의 조상으로 간주되었음을 시사한다.
[하티]
- 팜바(Pamba)
- 피트카나(Pitkhana) - 기원전 18세기 쿠사라(Kussara) 왕
- 피유스타(Piyusti)
- 아니타(Anitta) - 피트카나의 아들
- 투드 할리야(Tudhaliya)
- 푸루갈마(Pu-Lugal-Ma)
[히타이트 고왕국]
- 라바르나 1세(Labarna I, 1682~1650)
- 하투실리 1세(Hattusili I, 1650~1620)
- 무르실리 1세(Mursili I, 1620~1590)
- 한틸리 1세(Hantili I 1590~1560)
- 지단타 1세(Zidanta I, 1560~1550)
- 암무나(Ammuna, 1550~1530)
- 후지야 1세(Huzziya I, 1530~1525)
- 텔리피누스(Telipinus, 1525~1500)
후대의 히타이트 국가의 왕궁 문서 저장소에는 이전 왕들의 군사적 업적을 기록하고 왕위 계승 문제를 다루는 일련의 문서들이 있었다. 이것은 매우 편향적이었는데 살아남은 정치 군주를 합법적인 군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투실리와 고대 히타이트 왕국
고대 히타이트 왕국은 17세기 초중반에 하투실리로 알려진 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쿠사라(Kussara)의 왕위를 이어 받는 하투실리는 빠르게 중앙 아나톨리아에 있는 경쟁 국가들을 무찔렀다. 정복한 토시 가운데 하투사(Hattusa)라는 도시도 있었다. 하투실리는 하투사를 왕국의 수도로 만들고 자신의 이름도 수도의 이름에 맞추어 개명하였다. 하투사가 다소 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북해 연안 그룹, 특히 가스가(Gasga)라고 불리는 민족으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다.
하투실리는 히타이트의 남방 정책을 시작한 왕이다. 아나톨리아가 여러 강과 골짜기로 나뉘어 농업 용지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히타이트가 북부 시리아를 장악하려 했던 것은 넓은 곡식 평야에 대한 필요에서 온 것일 수 있다. 하투실리는 17세기 중엽에 북서 시리아를 장악한 얌캇 왕국을 침입했다. 히타이트 왕은 알라락(Alalakh)을 포함한 도시들을 침략했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계속된 원정에도 불구하고 얌캇의 수도인 알레포는 함락되지 않았다. 하투실리는 남서아나톨리아로도 원정을 떠났다. 자신의 통치 말에 큰 국가를 이루었지만 국내적으로 히타이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투실리의 아들들이 그의 말년에 반란하였다. 그래서 하투실리는 자신의 조카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했는데, 그 조카가 하투실리를 배반한다. 죽으면서 하투실리는 자신의 손자인 무르실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한다.
기원전 17세기 경 고대 근동, 왼쪽 구석 아나톨리아에 히타이트 왕국이 있다. |
무르실리 이후 히타이트 왕국
무르실리는 알레포와 바빌론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는 원정을 통해 도시를 함락한 후 그곳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무르실리의 원정의 결과 바빌로니아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무르실리는 원정에서 귀향하자마자 그의 처남인 한틸리(Hantili)에게 암살당했다. 한틸리 또한 암살당하고 히타이트 왕위를 얻기 위해 몇몇의 경쟁자들이 서로 경쟁했다. 이와 같은 내부적 불안정은 히타이트 왕국으로 하여금 본토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 대한 통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히타이트 왕국은 14세기가 되어서야 국제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자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의 전통에 철저히 영향을 받았다. 히타이트 언어는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바빌로니아 쐐기문자와 음역 방법에 크게 영향받았다. 바빌로니아는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근동의 모든 문명들의 문학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히타이트 고대 문서를 통해서 왕을 선출하는 귀족 회의에 대한 언급은 때때로 근동의 다른 지역의 관습보다 더 민주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인도-유럽의 관행이 여기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군사적인 면에서 히타이트 왕국은 알레포와 바빌론을 제거함으로 근동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히타이트도 어떤 다른 나라도 그 두 도시의 멸망으로 생긴 공간을 즉시 채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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