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5일 금요일

제2천년기 후반의 서부 국가들 : 히타이트의 신왕국

2천년기 후반의 서부 국가들 : 히타이트의 신왕국

 

중앙 아나톨리아는 히타이트 왕국의 핵심 영토였다. 히타이트 왕국은 하티’(Hatti)로 불렸다.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사(Hattusa)에는 히타이트의 역사에 대한 핵심 자료인 히타이트 정치사에 대한 많은 자료가 있다. 히타이트 역사 서술은 많은 연대기적인 문제가 있다. 히타이트 왕들의 재위 기간은 대략적이며 이집트 연대에 대한 지식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다.

 

히타이트의 수도는 중앙 아나톨리아, 즉 키질이르막강의 상류에 위치했다. 전성기 때의 하티는 서부 시리아도 통치하였다. 히타이트는 1800년부터 1200년까지 존재한 나라이다. 이 기간에 두 번 정도 국가적 흥성을 이루었는데 하나가 고대 왕국이라 불리는 17세기이고 다른 하나가 신왕국이라고 불리는 1400~1200년까지의 시기다.

 

히타이트 제국 : 기원전 1590년(빨간색), 기원전 1300년(주황색), 이집트의 영향권(녹색)

[히타이트 중왕국]

  • 알루얌나(Alluwamna) : 기원전 15세기 중반
  • 한틸리 2(Hantili II) : 기원전 1500~1450
  • 타후르와일리
  • 지단타 2(Zidanta II)
  • 후지야 2(Huzziya II)
  • 무와탈리 1(Muwatalli I) : 기원전 1400

 

[히타이트 신왕국] - Short chronology

  • 툿할리야 1(Tudhaliya I) : 기원전 14세기 초
  • 아르누완다 1(Arnuwanda I)
  • 하투실리 2(Hattusili II)
  • 툿할리야 2(Tudhaliya II) : 기원전 1360~1344
  • 툿할리야 3(Tudhaliya III) :
  • 숩필룰리우마 1(Suppiluliuma I) : 기원전 1344~1322
  • 아르누완다 2(Arnuwanda II) : 기원전 1322~1321
  • 무르실리 2(Mursili II) : 기원전 1321~1295
  • 무와탈리 2(Muwatalli II) : 기원전 1295~1272
  • 무르실리 3(Mursili III) : 기원전 1272~1267
  • 하투실리 3(Hattusili II) : 기원전 1267~1237
  • 툿할리야 4(Tudhaliya IV) : 기원전 1237~1209
  • 아르누완다 3(Arnuwanda III) : 기원전 1209~1207
  • 풉필룰리우마 2(Suppiluliuma II) : 기원전 1207~1178

 

툿할리야(Thdhaliya)라는 이름의 왕들은 남동 해안에 자리한 키주와트나를 포함한 중앙과 남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패권을 확인하였다. 키주와트나는 이전에 미타니가 통치하던 지역이었다. 더욱이 북서 시리아의 패권 도시인 알레포가 미타니에서 하티로 동맹을 옮겼다. 알레포는 남부 시리아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이집트와 미타니는 14세기 초에 히타이트의 압력에 연합군을 형성한다. 이 시기에 정략결혼과 왕래한 서신들이 있다. 이집트는 하티의 서쪽에 자리한 아르자와(Arzawa)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정략결혼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두 새롭게 등장한 하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아나톨리아의 서쪽과 북쪽은 하티에게 매우 문제가 된 지역이었다. 흑해 남쪽 해안 출신인 가스가(Gasga) 족은 하투사를 공격해 파괴했으며 서쪽 지방의 속국이었던 마두와타(Madduwatta)14세기 중엽에 남서 아나톨리아와 키프로스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련은 숩필룰리우마 1(재위 1344~1322)에 의해 만회되었다. 그는 아버지 툿할리야 3세 아래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검증받았다. 히타이트 중심부로부터 남쪽과 서쪽의 아나톨리아 지방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 후 숩필룰리우마는 북으로부터 미타니를 침략하여 수도를 점령하였다. 미타니의 서부 지방은 그의 속국이 되었다. 이로써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까지 히타이트의 통치가 확장되었다. 특히 다마스커스 지방까지 히타이트의 영향권 아래 들어왔다. 우가릿, 카데스, 아무르를 포함한 수많은 국가들의 왕들은 숩필룰리우마와 종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이집트의 여왕이 남편을 여의자 숩필룰리우마의 아들을 남편으로 요구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있었다.

 

숩필룰리우마의 통치 말에 하티는 북시리아의 대부분을 확실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두 왕자를 전략적으로 중요한 카르케미스와 알레포에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미타니와 다마스커스 지역에는 속국 왕을 두었다. 숩필룰리우마 자신과 그의 후계자가 시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옮겨온 역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아들 무르실리 2(1321~1295)는 시리아에서도 패권을 잃지 않았다. 숩필룰리우마 집권 초에 이집트에게 쏠렸던 서쪽의 아르자와를 격파하였다. 북쪽의 가스가 족도 공격하였다. 그러나 후자(가스가 족)는 무와탈리 2(1295~1272)가 통치할 때 하투사를 점령하는 등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것은 하티가 시리아에 신경을 쏟다보니 북쪽 국경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여 아나톨리아 내지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무와탈리는 시리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남부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무명의 도시 타루훈타사(Tarhuntassa)로 수도를 옮겼다. 19왕조 아래에서 이집트도 다시 부흥하여 시리아에 계속적인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은 람세스 2세와 무와탈리 2세 사이의 카데스 전쟁(1274)에서 절정을 맞이하였다. 물론 비문에서 람세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패배는 히타이트가 카데스 전쟁 후 남부 시리아까지 패권을 확장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무와탈리는 그의 형제(하투실리 3)에게 북쪽 지역을 맡겼다. 후자는 수년 전에 가스가에게 빼앗긴 하투사와 네릭이라는 제의 중심지를 탈환하였다. 무와탈리의 아들은 우르히-테숩은 무르실리 3세라는 칭호로 왕위에 올랐을 때, 하투실리 3세는 북쪽을 기지로 삼아 그 어린 왕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정통성을 가진 우르히-테숩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지지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하투실리 3세는 결국 그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그 후 30년간(1267~1237) 왕으로 다스렸다. 하투실리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외교이다. 그는 바빌론의 카다스만-투르쿠(Kadashman-Turgu)와 카다스만-엔릴(Kadashman-Enlil)과 관계를 맺고 아무루와 같은 속국들과의 조약을 재확인하였다. 무엇보다도 이집트와의 평화 조약은 그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1259년에 하티와 이집트는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고 협정을 체결하였다. 람세스 2세는 하투실리가 선택한 후계자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미타니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아시리아의 위협이 그 조약을 촉발시켰을지도 모른다. 하투실리의 후계자 문제는 그가 왕위 찬탈자라는 사실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하티는 매우 빠르게 쇠퇴해갔다. 내부적으로 왕위 내정자였던 툿할리야 4(1237~1209)는 무와탈리의 아들, 쿠룬타(Kuruta)의 강력한 왕위 주장에 맞서야 했다. 쿠룬타는 하투실리 3세가 타루훈타사의 왕으로 옹립하였었다. 쿠룬타가 하투사에서 발견된 인장에서 대왕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228~1227년의 기간에 잠깐 툿할리아 4세를 퇴위시켰던 것 같다. 어쨌든 툿할리야는 왕위를 다시 차지하였다. 아시라의 투쿨티-니누르타 1(재위 1243~1207)는 동에서 히타이트 제국을 공격하였고 아타톨리아의 서쪽 지방과 남서 지방의 속국들이 반란하였다. 에게 해에 인접한 지방에서의 반란은 아마 아히야와의 왕이라는 잘 알 수 없는 인물에 의해 촉발된 것 같다. 툿할리야 4세는 밀라와타(밀레투스)를 회복하였으나 아나톨리아 서쪽 지역에 대한 하티의 통치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숩필룰리우마 2세가 1207년에 왕위에 올랐을 때 하티의 멸망은 매우 임박한 것이었다. 하티의 붕괴는 명확하지 않다. 이집트 자료에 따르면 아나톨리아 지역 전체와 서부 시리아 지역이 전반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히타이트 도시들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카르케미스다. 그곳에서 히타이트 왕실의 한 분파가 자신들을 계속해서 대왕으로 불렀다. 이 붕괴는 1200년경에 발생한 전체 지역 시스템의 붕괴라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키주와트나의 위치 때문에 하티와 미타니는 그곳에서 자주 전쟁을 하였다. 14세기 초에 툿할리야 2세와 함께 키주와트나는 히타이트의 영향권 아래 완전히 들어왔다. 동시에 키프로스 섬의 일부 혹은 전체를 통치한 알라시야 왕국은 아마르나 편지에 증거되는 것처럼 그 시대의 강대국 중의 하나였다. 그 나라의 중요성은 아마 구리 광산 때문인 것 같다. 아나톨리아의 남서지방에 위치한 아르자와는 아마르나 편지 시대에 강대국 중의 하나로 등장하여 이집트 왕과 서신 왕래하였다. 아르자와는 1200년경 멸망할 때까지 하티로부터 계속 독립해 있었다.

 

서부 아나톨리아의 아히야와(Ahhiyawa)라는 나라는 미케네 그리스와 관계가 있다. 아히야와라는 말이 서부 아나톨리아에 설치된 미케네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군사적 기지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투실리 3세는 반란에 참여한 서부 지역에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아히야와 왕에게 편지를 썼다. 그를 형제라고 부르면서 하투실리 3세는 그의 영토에서 활동중인 반란군들을 제어해 주도록 설득했다. 하투실리의 후계자인 툿할리야 4세는 서쪽으로 군사적 원정을 감행하여 아히야와의 영토를 침입했다. 툿할리야 4세 이후 아히야와 인들에 대한 문서적 증거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 문서에 나타나는 해상 민족의 하나인 에크웨스(Ekwesh)와 동일시 될 수 있다면 그들은 12세기 초의 지중해 동쪽 지방에서 발생한 범지역적 재앙에 한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히타이트의 정치 구조는 종종 중세 서부 유럽의 봉건제도와 비교된다. 하티의 대왕은 핵심 지역은 직접 관할하지만 그의 영향 아래에 있는 대부분의 지역, 즉 서남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지역은 종속왕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종속왕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 지방 출신 사람이었다. 히타이트 종주왕들은 다양한 지역의 전통을 계속해서 존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치적 혹은 문화적으로 지역 전체를 통합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의 최고 지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런 자신의 지위를 대왕그리고 태양이라는 칭호로 나타냈다. 아버지-아들 순서로 계승되지 않았고 형제가 왕이 되었다. 무와탈리의 아들(우르히-테숩이 무르실리 3세의 이름으로 왕위에 오름)과 형제(무와탈리의 형제 하투실리 3) 사이의 왕위 다툼이 생겼다.

 

하티 왕들의 이름과 칭호는 히타이트의 다문화적 성격을 증명해 준다. 하티는 제2천년기 후반부의 고대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하티의 붕괴는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거의 완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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